※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7>왕실을 사로잡은 민간의 소리

'기산풍속도' 중 가객이 북소리에 맞춰 노래하고 있는 모습.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이따금 환호하는 외마디 소리(激賞時時一聲哄ㆍ격상시시일성홍)

넓은 뜰엔 구경꾼이 인산인해라(廣庭人海疊人山ㆍ광정인해첩인산)

이밤사 부질없이 횃불을 걱정마오(今宵莫漫勤添炬ㆍ금소막만근첨거)

반달이 구름 끝에 걸려 있으니(早有雲頭掛月彎ㆍ조유운두괘월만)

타고난 목청을 광대에 점지하여(天生牙頰付伶優ㆍ천생아협부령우)

궁상의 가는 소리 마디마디 수심이라(細嚼宮商字字愁ㆍ세작궁상자자수)

귀고리와 비녀가 떨어져도 아깝지 않아(墮珥遺簪渾不惜ㆍ타이유잠혼불석)

밤새도록 넋을 잃고 님을 위해 머문다(通宵忘返爲君留ㆍ통소망반위군류)

횃불로 밝힌 밤, 인산인해의 마당. 깊은 밤 많은 이들을 마당으로 불러 모은 것은 다름 아닌 광대의 소리. 궁상의 가락에 실린 광대의 타고난 목청은 청중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부녀자들은 소리에 취해 장신구를 흘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조선후기 시ㆍ서ㆍ화 삼절로 유명했던 자하 신위(紫霞 申緯ㆍ1769~1845)가 1826년에 지은 ‘관극절구십이수(觀劇絶句十二首)’ 중 일부다. 춘향가를 연행하는 소리꾼과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19세기 초엽 판소리가 당대인들의 마음을 훔치던 광경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조선후기 서민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성장한 판소리는 19세기에 이르러 양반층까지 향유하는 문화가 됐으며 더 나아가 궁궐 안 국왕마저 귀 기울이게 했다. 사람의 성정을 교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여흥을 위해 향유하는 음악을 삿된 것으로 취급했던 조선시대였던 만큼 국왕이 민간의 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권장할 만한 취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궁중에서는 판소리를 비롯한 민간의 예능이 종종 연행되었고 국왕의 특별한 애호를 사기도 했다.

당대를 호령하던 판소리 명창들은 어전(御前)에 나아가 소리를 펼치고 상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때로는 관직을 받기도 했다. 소리꾼이 임금에게 관직을 받은 사례는 19세기 모흥갑(牟興甲)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는데, 헌종 앞에서 재주를 펼쳐 동지(同知) 벼슬을 제수 받았다. 모흥갑은 앞서 소개한 신위의 ‘관극절구십이수’에서도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과 더불어 당대 유명한 명창으로 소개된 사람이다. 그는 사방을 진동시킬 정도의 탁월한 성량을 가진 소리꾼이었다.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소리를 했을 때 그가 질러낸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소리가 아마도 궁에까지 미쳤던 듯하다.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최대의 판소리 후원자였다. 대원군은 파락호 시절에 중인, 서얼 출신 인사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스스로 뛰어난 서화가로 풍류를 즐겼던 대원군은 중인 출신 가객인 박효관, 안민영 등을 총애했고 판소리의 최대 후원자였다. 당시 운현궁에는 박유전, 진채선 등의 명창이 기거하며 대원군의 후원 속에서 재능을 펼쳤다. 서편제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박유전은 대원군의 사랑채에서 소리를 연마하며 ‘강산제’라고 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판소리를 창조해냈다. 강산제라는 명칭은 그의 호를 딴 것인데, 대원군이 박유전의 소리를 듣고서 “네가 천하제일 강산이다”라고 평하며 이 호를 내려준 데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에 대한 대원군의 총애는 특별했다.

영화 ‘도리화가’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여류명창 진채선은 경복궁 낙성연에서 소리를 펼쳐 이목을 끌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운현궁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대원군은 집정 직후 전주 감영(조선시대 각 도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에 ‘전주통인청대사습’을 관장하도록 하고 여기에서 장원한 명창을 상경하게 했다. 지방의 소리꾼들을 발굴해 내고 그들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대원군의 판소리 후원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기산풍속도' 중 가객이 소리를 하자 무동이 흥겹게 춤추고 있는 그림.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판소리는 고종대 최대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전성기는 대원군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지만, 그가 실권한 후에도 판소리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다. 대원군과 갈등했던 고종이지만 음악적 기호만큼은 생부와 맞서지 않았다. 박황의 ‘판소리 소사(小史)’에 의하면 1900년을 전후로 전국에 이름난 명창이 200인을 넘어섰다고 한다. 부친의 영향으로 판소리를 비롯한 민간의 예능을 친숙히 여겼고, 이 취향을 중단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김창환, 송만갑, 박창섭, 이동백 등 당시 이름을 떨친 판소리 명창들은 모두 군주 앞에서 공연을 펼쳤고, 재주를 높이 산 임금에 의해 의관(議官)이나 감찰(監察) 같은 직계를 제수 받았다.

고종이 총애했던 민간 예능인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박춘재(1883~1950)일 것이다. 박춘재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널리 연행되었던 가곡, 잡가, 선소리, 재담소리 등에 두루 능했다. 그는 당시 ‘가무별감(歌舞別監)’으로 통했다. 이능화는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가무별감’ 항목을 풀이하면서, “박춘재가 잡가를 잘 불러 이와 같은 칭호가 있었다”고 했는데, 박춘재와 가무별감을 등치시킬 정도로 명성을 떨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재담과 재주를 펼쳤던 듯, 영친왕이 어렸을 때 박춘재를 좋아하여 영친왕이 울면 박춘재를 부르러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궁중에서 판소리를 비롯한 민간 예능에 대한 향유와 애호는 국왕 및 왕실 인물의 개인적 취향과 감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보다 공식적인 궁중ㆍ국가 행사, 연회의 자리에도 판소리 등 민간 예능은 적극적으로 수용, 활용되었다. 1900년 무렵부터 만수성절이나 천추경절 같은 황제와 황태자 탄신일 등 공식적인 경축 행사에 민간 연희 집단인 삼패와 광대, 가객으로 일컬어지는 판소리꾼이나 창부가 초대돼 공연했다.

프랑스 화가 조세프 드 라 네지에르가 그린 궁중 무희의 모습(l’Extreme Orient en Image, 1903). 저자 소장

또한 서양 각국과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형식과 내용이 재조정된 연향과 연희의 자리에도 선보였다. 이때 여성 무희들이 펼치는 궁중 전통의 정재(呈才) 공연이 한 자리에서 펼쳐지면서 궁중악과 민간의 음악이 경계를 허물고 공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01년과 1903년 대한제국에 온 부르다레(Emile Bourdaret)와 로제티(Carlo Rossetti)는 당시 궁중 연회에서 무희들이 펼친 학무, 포구락, 사자무 등의 정재 공연 뒤에 창부(倡夫)들의 소리 공연이 이어지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현재의 서울 광화문에 1902년 세워진 협률사.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궁궐 담장을 넘나들며 그 안에 머물던 음악이 밖으로 전파되고, 궐 밖의 음악이 안으로 밀려들어오던 현상은 1902년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칭경예식’을 준비하는 가운데 협률사가 설립되며 한층 본격화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비록 예식 행사 자체는 무산되어 정치, 외교 행사의 일환으로서 협률사의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협률사는 이후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상업화된 극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기녀들의 궁중 정재 공연이며 창우의 잡가와 소리, 창부 광대의 판소리, 탈꾼, 소리꾼, 춤꾼, 남사당 등의 공연이 펼쳐지면서 궁중과 민간의 예술은 경계를 허물고 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이와 같은 전개를 왕실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왕실의 사업에서 비롯된 상업화된 극장의 출현과 여기에서 펼쳐진 궁중과 민간의 예능을 통해 전통 예능이 근대의 공연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음은 분명하다. 언젠가 전통 예능의 신명나는 소리에 어깨춤을 들썩여 본 적이 있다면 19세기 말부터 지속되어 온 왕실 문화와 민간 예능의 넘나듦이 만들어놓은 징검다리 덕분일 것이다.

김재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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