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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다, SF]70대 노작가, 트럼프의 미국을 꼬집다

입력
2019.12.20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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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22> 스티븐 킹의 ‘고도에서’ 

스티븐 킹이 오마주한 리처드 매드슨의 장편소설 '줄어드는 남자'(1956)는 이듬해 'The incredible shirinking man'이라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스티븐 킹이 오마주한 리처드 매드슨의 장편소설 '줄어드는 남자'(1956)는 이듬해 'The incredible shirinking man'이라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프란츠 카프카의 걸작 ‘변신’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된 사내의 이야기다. 여기 영문도 모른 채 큰 변화를 맞닥뜨린 또 다른 사내가 있다. 평범한 중년 남성 스콧 캐리. 195㎝에 100㎏이 넘는 배불뚝이다. 이혼남이지만 수입도 안정적이고, 동네 사람과 사이도 좋은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몸무게가 자꾸 줄어드는 것이다.

몸무게가 줄어든다니! 다이어트에 목매는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하지만 스콧에게 닥친 일은 심상치 않다. 매일 체중계에 오를 때마다 눈에 띄게 몸무게가 줄어든다. 90, 80, 70㎏. 이렇게 몸무게가 줄어드는데도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스콧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나를 구속하던 중력의 영향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스티븐 킹의 소품 ‘고도에서’는 중력의 영향이 줄어드는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이다. 이 대목에서 ‘앗!’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 소설은 2013년에 세상을 뜬 미국 장르 소설의 거장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 작품 ‘줄어드는 남자’를 기리는 작품이다. 매드슨의 이름이 생소한 독자라면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원작 소설의 작가라고 기억하자.

킹은 여러 차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 작가로 리처드 매드슨을 꼽았다. 그는 ‘고도에서’의 헌사에서 “리처드 매드슨을 추모하며”라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아예 주인공 이름 ‘스콧 캐리’도 그대로 가져왔다. 신장을 포함한 덩치가 줄어드는 원작의 설정은 킹 식으로 비틀었다. (지금 읽어봐도 ‘줄어드는 남자’는 걸작이다.)

킹이 단지 선배 작가에게 존경을 표시하고자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몸무게, 정확히 말하면 중력의 영향이 점점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주인공 스콧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옆집에 이사 온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 부부가 마을 사람들과 겉돌면서 적응을 못 하는 것이다. 이웃인데다 개똥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된 스콧은 오지랖 넓은 실천을 시작한다.

그러니 이 소설은 두 겹의 이야기로 독자를 유혹한다. 겉으로는 말 그대로 ‘실존’의 위기에 직면한 사내의 이야기이다(몸무게가 계속 줄어들면 결국 어떻게 될까?). 여기에 더해서 그가 공동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소수자 혐오와 증오에 맞서는 이야기가 얹어지면서 작품은 더욱더 빛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감동이 밀려온다.

공포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이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소설을 써낸 이유도 알 것 같다. 70대의 노작가는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트럼프의 미국을 낮은 목소리로 비판한 것이다. 2009년 ‘언더 더 돔’에서 갑자기 돔에 갇혀 버린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재난(9ㆍ11 테러) 이후에 공동체를 망가뜨린 조지 W 부시 행정부 치하의 8년을 풍자했던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ㆍ진서희 옮김

황금가지 발행ㆍ204쪽ㆍ1만2,000원

가끔 한국에서도 작가가 날 선 목소리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날 것으로 드러낼 때가 있다. 킹의 ‘고도에서’나 ‘언더 더 돔’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작가라면 소셜 미디어에서 선동에 앞장서기보다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제대로 된 작품 한 편 써내지 못하면서 작가랍시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일이야말로 소음 아닐까.

‘고도에서’의 짧은 분량에 실망했다면, 앞에서 언급한 ‘언더 더 돔’을 읽어보자. 생각해 보라. 고양, 전주, 진주, 목포 같은 도시를 투명한 돔이 덮는다. 안에서 나올 수도 없고, 밖에서 들어갈 수도 없다. 엄청난 화력의 폭격으로도 뚫을 수 없다. 영문도 모른 채 돔 안에 갇힌 사람들의 생존기. 2000년대에 킹이 쓴 이 작품을 다시 살펴보니, 마치 트럼프의 미국을 예고한 것도 같아서 섬뜩하다.

SF 초심자 권유 지수 :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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