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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의, 외칠수록 멀어진다

입력
2019.12.23 04:40
수정
2019.12.23 21:3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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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부자들' 포스터.
영화 '내부자들' 포스터.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대검 중수부 조사실에 한기가 돌았다. 대기업 회장의 로비스트 역할을 하던 기업인은 새벽 2시 검사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검찰은 대기업의 정치권 금품로비를 수사하고 싶어했다. 검사는 기업인이 제보하기를 바라며 집요하게 설득 중이었다. “이런 수사를 하는 게 정의”라는 논리를 곁들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기업인이 역제안을 했다. 수임계약서도 없이 변호사 5명에게 현금으로 10억원씩 전달한 사건을 먼저 수사하면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검찰총장과 법무부 간부, 법원장 출신이 포함됐다. 기업인은 “이런 수사가 더 정의롭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사의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간 진술조서는 뭉개졌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정의를 원했지만 변호사 수사도 정치권 수사도 없던 일이 돼버렸다. 정의에 대한 머리 속 관념이 저마다 다르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정의를 두고 벌어진 두 사람의 에피소드는 과거 일로만 치부될 게 아니다. 세상에 정의로운 일이 드문 데도 정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빈도는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의사결정과 목표를 정당화해주는 만병통치약처럼 쓰이고 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정의 사랑’은 최근에도 엿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 11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 요청서에서 ‘공정과 정의’ ‘인권과 정의’를 언급하며 추 후보자를 칭송했다. 한 번으론 부족했는지, 두 번이나 정의를 언급했다.

실제로 ‘정의를 독점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정의는 문재인 정부와 떨어뜨릴 수 없는 말이다. 문 대통령은 1년 전 “정의로운 나라, 꼭 이뤄낼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청산을 두고는 정의로운 나라로 가는 출발이라고 강조했고, 4.19 민주묘지를 참배하면서도 방명록에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썼다. 거슬러 올라가면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귀에 쏙 들어오는 취임사까지 남겼다.

그런데 청와대 못지 않게 정의를 사랑하는 곳이 또 있으니, 바로 정의사회 구현을 존재 이유로 밝히고 있는 검찰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검사가 조직폭력배를 향해 “넌 복수를 원하지만 난 정의를 원한다”고 떠든 게 영화적 상황만은 아닌 것이다. 1년 전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검찰은 “정의에 반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청와대와 검찰이 최근 ‘유재수 감찰 무마’ 및 ‘울산시장 선거개입’ 수사를 두고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두 기관이 경쟁적으로 정의를 외치는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엔 ‘진리에 맞는 옳은 도리’,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바른 도리’라는 뜻으로 정리돼 있다. 멋있는 말이지만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는 게 문제다. 올바른 도리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은 정의(定義)를 내리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나쁜 놈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장면을 정의라고 상상한다면, 정의의 개념은 왜곡되기 쉽다. 상대를 벌주는 통쾌함은 정의를 외치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이성의 정상적 작동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 마련이다. 더구나 현실은 영화처럼 선악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정의롭다고 말하는 자는 대체로 정의롭지 않은 자를 마음대로 설정한 뒤 공격한다. 검찰이 선택적 정의를 실천한다고 욕은 먹어도 사법절차라도 따르지만, 정치권은 입맛대로 정의의 의미를 편집하고 강요하므로 위험성은 더 크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조국 사태와 유재수 사건 등 청와대를 둘러싼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드러나면서 이 정부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정의의 값어치가 많이 떨어졌다. 이제 정의는 들을 만큼 들었으니 말로 내세우기보다는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둘 때가 됐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게 남아있긴 한가’라는 영화 속 대사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이다.

강철원 기획취재부장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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