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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파워와 공중부양, 어떤 걸 고를래? 우리 아이는 학원 도움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입력
2019.12.28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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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아는 엄마 기자]

‘10㎝ 공중부양할 수 있는 능력, 곤충과 대화하는 능력, 남의 불행을 가져오는 능력,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헐크의 힘을 하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능력.’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능력들이다. 이 중 가장 갖고 싶은 능력을 하나만 고르고 이유를 설명하라고 물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은 이 엉뚱한 질문의 출처는 영재학교다.

한 유명 입시학원에 따르면 국내 한 영재학교가 서류전형과 지필고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에서 이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있을 리 없다. 어떤 능력을 고르든 얼마나 논리적, 과학적, 창의적으로 구술하느냐가 당락을 좌우했을 것이다.

정부가 외국어고와 자율형사립고를 2025년 일괄 폐지한다고 발표한 뒤 ‘살아남은’ 영재학교와 과학고에 학부모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위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 부모들을 잡기 위해 사교육 시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분위기다. 정부의 외고·자사고 폐지 계획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사교육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영재학교·과학고 입시의 중요 관문인 지필고사나 영재성 검사에서 수준 높은 수학과 과학 학습능력을 요구하는 만큼 일찌감치 사교육 체계에 들어올수록 유리하다는 게 학원들의 논리다. 아이가 세상에 없는 5가지 능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창의적인 문제를 공교육만으로는 멋들어지게 풀어낼 수 없다고 여기는 학부모들은 자연스럽게 학원 문을 두드리게 된다.

최근 집 근처에서 열린 몇몇 유명 학원 설명회에 참석해 영재학교에 응시하는 학생들이 평균적으로 진행한다는 수학·과학 학습 일정을 들어봤다. 사교육 시장의 상위권 아이들은 초등학교 4, 5학년 때 중학교 수학·과학 학습을 시작해 3년 전 과정을 6학년 때 끝낸다고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 전 고교 수학 공부에 들어가고, 중학교 입학 후엔 각종 경시대회 준비를 별도로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9학년도 영재학교 입학시험에 출제된 수학 239개 문항 가운데 55.2%인 132개 문항이 중학교 정규 교육과정을 벗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중학교 교과서에 없는 가우스함수, 공간도형, 준정다면체 같은 개념을 활용하는 문제가 나왔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통해 선행학습이나 심화학습을 해온 아이들이 유리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학입시에서 정시를 확대하겠다는 교육부 방침 역시 정부의 의도와 달리 사교육 과열을 불러올 조짐이 보인다. 학원이나 학부모들 사이에선 정시 확대가 곧 학생의 교내 활동이나 다양한 잠재력보다 내신 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가 대입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국어·영어·수학·과학 같은 주요 교과목 성적이 더 중요해질 게 분명한 만큼 정시 확대 정책 역시 수학과 과학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을 유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게 학원들의 논리다. 대입 수시 전형에서 불공정한 방식으로 합격에 성공한 일부 특권층 자녀들 때문에 엉뚱하게 사교육 부담만 늘게 생겼다며 학원들은 ‘비특권층’ 학부모들의 감정적 지지까지 이끌어 냈다.

한 학원은 “수학 실력은 곧 엉덩이 힘으로 결정된다”고 했다. 그 학원이 아이들을 얼마나 오래 책상 앞에 앉혀 놓는지,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게 하는지를 강조한 것이다. 등 떠밀려 문제를 오래, 많이 푼다고 수학적 사고력이 길러지는 건 아니다. 어떤 학원 임원은 “중학교 과학은 이론 없이 현상만 배우는 거라 달달 외우면 된다”는 얘길 거리낌 없이 했다. 중학교 과정에 나오는 빛의 반사와 굴절, 입자의 운동, 물질의 상태 변화 등을 그냥 암기해 버린 학생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나 호기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상황이 이러니 영재학교·과학고도 아예 폐지하자, 학력고사만으로 대학 가던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극단적인 목소리마저 나온다. 수학과 과학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없앤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역행하는 것과 다름없다. 학원과 과외 학습으로 국영수과 성적만 높이면 좋은 대학 가던 과거를 답습하는 것도 구시대적이다. 곤충과 대화하고 싶은 아이, 헐크처럼 힘이 세지고 싶은 아이가 학원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논리를 풀어낼 수 있도록 공교육이 가르쳐야 한다. 어떤 입시 제도로도 사교육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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