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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명물 된 모리오카 냉면, 그 속엔 평양ㆍ함흥냉면 향한 짙은 향수가…

입력
2020.01.08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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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일본, 다른 일본] 움직이는 식문화와 ‘모리오카 냉면’ 

모리오카 냉면의 원형을 만든 ‘쇼쿠도엔’ 앞에 손님들이 줄을 지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김경화ㆍ일러스트 김일영
모리오카 냉면의 원형을 만든 ‘쇼쿠도엔’ 앞에 손님들이 줄을 지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김경화ㆍ일러스트 김일영

한창 메밀 향이 좋을 계절이라 10년도 넘은 추억을 돌이켜본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긴 연휴를 맞았었다. 특별한 첫 휴가를 빌어 도쿄에서 동북쪽으로 500㎞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리오카’(盛岡)라는 도시에 다녀오기로 했다. 천년 넘는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교토, 이국적인 풍경과 기후로 인기가 있는 오키나와, 홋카이도 등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그에 비해 모리오카는 일부러 찾아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요, 풍광이 빼어난 것도 아니요, 외지의 방문객이 매력을 느낄 만한 도시는 아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지방 도시가 어쩌다가 ‘첫 휴가지’의 낙점을 받게 되었는가. 필자의 ‘소울 푸드’, 평양냉면에 대한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은 평양냉면이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이라고 하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슴슴하고 깊은 그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한겨울에도 냉면집을 찾는 식객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실향민 가족으로, 늘 단골로 복작이던 평양 냉면집에서는 툭툭한 이북 사투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필자는 친가는 평안북도 정주, 외가는 평양 출신인 ‘진골’ 실향민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외식 하면 이북식 불고기에 물냉면으로 마무리하는 외길이었으니, 평양냉면이 ‘소울 푸드’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가족력에서 비롯된 평양냉면 사랑이 어쩌다가 일본 땅에서 동했는가. ‘모리오카 냉면’이라는 음식 때문이었다. 모리오카 시내에 있는 ‘쇼쿠도엔(食道園)’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시작되었다는 명물 메뉴인데, 실향민의 마음이 설레게도 ‘원조 평양냉면-불고기’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 뜬금없는 원조집 스토리를 일본의 인터넷 정보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54년, 함경도 함흥 출신의 재일동포 양씨가 모리오카에 ‘쇼쿠도엔’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고, 주 메뉴로 평양냉면을 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여기에서 ‘어라?’ 하는 생각이 든다. 함흥은 매콤한 양념과 힘찬 면발이 매력 포인트인 비빔냉면이 유명하다. 면발에는 메밀을 쓰지 않고, 육수에 말아 내놓는 차림도 아니다. 평양의 물냉면과 함흥의 비빔냉면은 같은 냉면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맛의 계보가 전혀 다른 것이다. 함흥 출신인 주인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한다는 말에는 의문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다.

이 식당이 개업할 때에 내놓은 국수는 거뭇거뭇한 메밀 색을 띠고 있었다고 하니, 평양식 냉면을 지향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모리오카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메밀을 활용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렇다고 한들 진한 양념장 맛에 익숙한 함흥 사람이 은근한 메밀향으로 알듯 말듯 끼부리는 평양냉면을 재현하기가 쉬웠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첫 메뉴에는 혹평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맛의 개선에 나선 주인장은 잠깐 배신했던 고향 함흥의 맛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메밀 대신 감자 녹말을 듬뿍 첨가해 쫄깃한 식감의 면을 뽑고, 함흥냉면 계통의 달착지근하고 매콤한 양념을 쓰되, 매운 것에 익숙지 않은 일본인을 위해 육수를 부어 맛을 부드럽게 했다. 평양냉면의 이름을 빌었음에도 맛은 전혀 다르고, 양념과 식감은 함흥냉면과 비슷하지만 면의 굵기나 맛의 배합은 전혀 다른, ‘모리오카 냉면’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낯설던 이 면요리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야금야금 인기를 끌더니 어느새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 음식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80년대 창업한 ‘평평샤’는 ‘모리오카 냉면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사진 김경화ㆍ일러스트.
1980년대 창업한 ‘평평샤’는 ‘모리오카 냉면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사진 김경화ㆍ일러스트.

‘쇼쿠도엔’은 일본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본고장의 맛’이라는 상표의 사용 허가를 받은 명실상부 원조집이다. 비록 맛은 새롭게 태어났지만, 처음 내걸었던 ‘원조 평양냉면’이라는 간판을 지금도 내리지 않았다. ‘냉면은 역시 평양’이라는 명분을 지키고자 하는 실향민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필자는 이런 뒷사정은 전혀 모르는 채 TV의 맛집 탐방 프로그램 속에서 언뜻 본 ‘원조 평양냉면’이라는 간판 하나에 꽂혀서 모리오카행 열차에 올랐다. 원조 평양냉면의 맛을 기대했던 터인지라 쫄면처럼 질깃한 면발, 들큰한 국물 맛에, 실망도 실망도 그런 큰 실망이 없었다. 지금은 ‘모리오카 냉면’을 전혀 다른 매력의 음식으로 인지하고 찾아 다니며 먹기도 하지만, 그 때에는 평양냉면도 함흥냉면도 아닌, 정체 모를 차가운 국수 한 그릇에 단단히 배신감을 느꼈다.

문화는 머무르지 않는다. 교통 수단과 정보 기술이 발달하기 전, 머무를 집이 없이 길 위를 전전하는 것은 고달픔의 대명사였다. 오죽하면 이동하며 떠도는 삶의 여정을 ‘역마살’이라는 측은한 이름으로 위로했겠는가. 문화의 이동 역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이나 식민지 개척, 기근이나 자연 재해로 인한 이주 등 강제적,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이동이 이루어졌다. 자연 재해의 피해가 클수록 사람들은 멀리까지 이동했고, 전쟁이 길수록 문화는 빨리 퍼졌다. 한반도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일제 시대는 식민주의의 폭력을 업고 문화의 이동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였다.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혹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주했고, 그 속에서 습관과 생각도 옮겨지고 뒤섞였다.

전파된 문화가 낯선 땅에서 자리잡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시행착오가 잦고, 필연적으로 변화도 겪었다. 함흥냉면에 맛의 뿌리를 둔 ‘모리오카 냉면’이 탄생한 경위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파된 식문화가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잠깐이나마 평양냉면이 명함을 내밀었던 해프닝은 문화의 이동성 속에 숨은 블랙 유머라고도 할 수 있다.

이동하는 문화의 속성와 관련해서 “주변으로 갈수록 오리지널 문화가 남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식문화로 예를 들자면,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오리지널 레시피의 정통 프렌치 메뉴가 오랫동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산전수전 나름의 변화를 겪었을 파리의 레스토랑보다, 19세기에 ‘이식된’ 채로 보전된 호찌민의 프렌치 레스토랑이 ‘진짜’에 더 가까운 맛을 재현할 수도 있다니 흥미로운 일설이다.

예리한 독자라면 “요리의 ‘진짜’ 맛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백번 천번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을지 모르는 오리지널의 맛이라는 것이 미식가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라는 점도 이해해 달라. 냉면 마니아를 자부하는 필자가 ‘모리오카 냉면’에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낀 것은 그곳에서 진짜배기 평양냉면을 맛볼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희망 때문이었다.

모리오카에서 평양냉면의 옛날 맛을 찾아보겠다는 야망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지만, 필자의 냉면 탐구는 기대조차 않던 도쿄에서 반전을 맞이했다. 평양냉면은 메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배어나는 음식인데, 그런 점에서 일본의 소바와 맛의 지향점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메밀의 향과 식감을 중시하는 차가운 면 요리라는 점에서 두 음식은 의외로 촌수가 가깝다.

소바는 맛의 스펙트럼이 의외로 넓어서 지역과 가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음식인데, 한 젓가락 들이키는 순간 평양냉면의 담백한 풍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도쿄 중심 관동 지방에서 내놓는 섬세하고 향이 좋은 소바이다. 탄력 있지만 툭툭 끊기는 면발이며, 메밀의 향을 북돋기 위해 가능한 한 담백하게 유지하는 국물(소바의 경우는 쯔유) 맛이며, 따뜻한 면수를 곁들이는 습관도 비슷하다. 평양냉면과 소바의 은밀한 내통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한번쯤 탐구해 보고 싶은 주제이다.

김경화ㆍ칸다 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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