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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오! 베트남] “지휘봉 잡은 바리톤 김동규, 클래식의 박항서 같았다”

입력
2020.01.09 04:40
수정
2020.01.09 08:3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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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한국기업들 첫 메세나 음악회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가수로 나선 바리톤 김동규(연단 위)씨가 지휘자 호 유이 쯔엉(김동규씨 왼쪽) 교수와 자리를 바꿔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가수로 나선 바리톤 김동규(연단 위)씨가 지휘자 호 유이 쯔엉(김동규씨 왼쪽) 교수와 자리를 바꿔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아니, 지휘자 하나 바뀌었다고 같은 오케스트라단 연주가 이렇게 달라집니까?”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베트남한인메세나 신년 음악회 객석은 연주회 말미 크게 술렁였다. 350여 객석을 휘어잡으며, 또 들었다 놓으며 현란한 공연을 선보이던 바리톤 김동규씨가 갑자기 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아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 준비한 곡들이 모두 바닥났는데도 연신 앙코르를 요청하는 뜨거운 객석 열기에 가수 리더인 김씨가 즉흥적으로 벌인 쇼였다. 클래식 크로스오버의 대표 주자인 그는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음악에서도 ‘박항서’ 나올 수 있어

지휘자 호 유이 쯔엉 부총장(응우옌 땃 탄 대학교 예술대)은 반강제로 연단에서 내려와 가수들과 나란히 섰다. 겉으론 웃음과 미소를 내비쳤지만 황당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보다 큰 체구의 김씨가 능숙한 손동작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동안 쯔엉 부총장은 뒤를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맨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바리톤 지휘자는 더 웅장하고, 더 정교한 소리를 오케스트라에서 뽑아냈다. 이내 쯔엉 부총장도 그 선율에 몸을 실었다. 가수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지휘자가 가수석에서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베트남 예술계 초유의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베트남한인메세나(VKMA) 공연 도중 바리톤 김동규씨가 지휘자 호 유이 쯔엉 부총장(맨 왼쪽ㆍ응우옌 땃 탄 대학교 예술대) 대신 연단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다소 당황한 기색의 쯔엉 부총장이 가수석에서 손을 저으며 바리톤 지휘자를 쳐다보고 있다. 지휘자 오른쪽으로 선 베트남 전통악기 ‘단보우’ 연주자인 레화이프엉, 메세나 1호 장학생 부은혜(본명 부꾸인녀안)씨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휘자를 쳐다보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베트남한인메세나(VKMA) 공연 도중 바리톤 김동규씨가 지휘자 호 유이 쯔엉 부총장(맨 왼쪽ㆍ응우옌 땃 탄 대학교 예술대) 대신 연단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다소 당황한 기색의 쯔엉 부총장이 가수석에서 손을 저으며 바리톤 지휘자를 쳐다보고 있다. 지휘자 오른쪽으로 선 베트남 전통악기 ‘단보우’ 연주자인 레화이프엉, 메세나 1호 장학생 부은혜(본명 부꾸인녀안)씨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휘자를 쳐다보고 있다.

곡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 김씨는 공연 중 다른 가수들과 함께 이미 선보인 곡을 지휘자만 바꿔 다시 연주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로 공연을 마무리한 쯔엉 부총장은 “10년 넘게 지휘하면서 가수한테 지휘봉을 넘긴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한국 가수와 베트남 악단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 교감하는 훌륭한 장이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공연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보다 신세계를 경험한 경외심이 묻어났다.

지난 6일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베트남한인메세나 신년 음악회에서 바리톤 김동규씨가 현란한 몸 동작과 함께 클래식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6일 베트남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에서 열린 베트남한인메세나 신년 음악회에서 바리톤 김동규씨가 현란한 몸 동작과 함께 클래식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지휘자뿐이 아니었다. 현지 매체 사이공타임스 공동설립자로 현재 베트남컨설팅그룹을 이끌고 있는 도안 후 득 대표는 “굉장한 무대였다. 새해부터 새롭고 큰 감동을 받고 돌아간다”고 했다. 현지 인터넷매체 징의 쩐 득 쯔엉 기자도 “오늘 음악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박항서 감독 하나 바뀐 뒤 완전히 달라진 베트남 축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며 “음악 분야에서도 양국 교류가 더욱 활발해져 베트남 클래식이 한 단계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베트남 진출 기업들 십시일반 음악회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스가 ‘베트남한인메세나협회(VKMA)’와 공동으로 처음 주최한 이번 신년 메세나 음악회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날 행사가 한국 교민은 물론, 베트남인 참석자들로부터도 높은 호응을 받으면서 현지 한국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 영역이 음악 등 예술분야로 확대될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 안효선 VKMA 회장은 “한국과 베트남은 특별한 사이를 넘어, 이제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특수 관계로 진일보했다”며 “이런 밀월 기간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베트남 사람들 마음 속에 한국 기업들이 오래 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메세나 협회를 꾸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행사 날짜가 다가오고 포스터와 프로그램 리플릿 등 세부 계획이 공개되자 많은 기업이 동참 의사를 밝혀 왔다”면서 “베트남에 도움을 주고 싶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또 사회공헌활동 ‘아이템’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메세나 사업은 많은 기업들에 훌륭한 선택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 외벽에 설치된 음악회 배너를 한 시민이 보고 있다.
호찌민국립음대 음악당 외벽에 설치된 음악회 배너를 한 시민이 보고 있다.

실제 메세나 사업을 향한 기업들의 관심은 음악회 배포 티켓 수 대비 높은 객석 점유율로 확인됐다. 전체 365석 객석보다 20% 가량 많은 표를 배포했는데, 90%가 꽉 찼다. 호찌민 음악당 관계자는 “통상 2배 이상의 티켓을 뿌려도 객석 절반이 차면 성공”이라며 “이번 음악회는 응답률이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현지 신문 광고와 입소문을 타고 음악회 문의가 이어졌지만 주최 측에서는 티켓을 소지하고도 입장하지 못하는 ‘사고’에 대비해 보수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이번 행사에는 한국일보 모기업인 동화기업의 베트남 현지 합작사 VRG동화, 외국계 1위 은행으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한베트남은행 외 현지에 진출한 우리 중소ㆍ중견 기업 10여곳이 힘을 모았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 앞에서 소프라노 오희진(붉은 드레스)씨가 연주하고 있다. 1975년 사이공(호찌민시의 옛이름) 함락 후 호찌민국립음대로 바꾼 이 대학의 건물들은 프랑스 식민 당시 지어졌지만 여전히 강의, 교무, 연습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음악당 홀은 가수가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러도 모든 객석에서 똑같은 크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 앞에서 소프라노 오희진(붉은 드레스)씨가 연주하고 있다. 1975년 사이공(호찌민시의 옛이름) 함락 후 호찌민국립음대로 바꾼 이 대학의 건물들은 프랑스 식민 당시 지어졌지만 여전히 강의, 교무, 연습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음악당 홀은 가수가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러도 모든 객석에서 똑같은 크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클래식 황무지에 작은 씨앗

이날 음악회는 클래식 교육이 없다시피 한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에 의해 메세나 사업이 싹을 틔웠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베트남에서는 12년 공교육 과정 중 음악교육이 초등 5학년 이후 6년에 그친다. 이마저도 최근에야 크게 확대된 것이다.

클래식을 접할 기회는커녕, 학교 음악수업도 일주일에 한 번, 35분짜리 형식적 교육이 전부이다. 대부분 선생님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이론 중심으로 가르친다. 이 때문에 음악수업은 물론 교사직도 인기가 없으며, 음악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에 학생들로부터 꽃 한 송이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가족과 함께 음악회를 찾은 마이 호찌민인문사회대 한국학과장은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 좋아했다. 베트남에서 보기 힘든 공연을 선사한 한국기업들에 감사 드린다”고 호평했다. 직장 동료들과 음악회를 찾은 베트남상공인연합(VCCI) 관계자 역시 “한국 기업들이 의식주 지원에서 의료ㆍ장학사업으로, 다시 예술 영역으로 사회공헌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며 “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의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베트남인들의 객석 점유율은 25%가 넘었다.

베트남 측 오케스트라단원들과 지휘자가 공연을 앞두고 무대에 설 가수들과 함께 리허설을 하고 있다.
베트남 측 오케스트라단원들과 지휘자가 공연을 앞두고 무대에 설 가수들과 함께 리허설을 하고 있다.

특히 이날 공연에선 지난해 7월 VKMA 창립에 맞춰 1호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서 유학 중인 부은혜씨도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그는 한국의 아리랑에 해당하는 베트남 전통 노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곡을 대선배 성악가들 앞에서 구성진 소리로 소화해 큰 박수를 받았다. 부씨는 “클래식 황무지 베트남에 다시 돌아와 많은 학생들이 진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오늘 무대 경험은 나 자신을 그 길로 더 강하게 이끌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음대에 진학하려면 학교를 다니면서 호찌민음대 등 국립음대 부설 음악학교 수업을 병행해야 한다. 극소수가 이렇게 음대를 나와 후학을 양성할 수 있지만 수입이 적어 개인레슨 강사로 터를 잡는 경우가 많다. 부씨와 같은 포부를 가진 청년들이 많지 않은 이유이다. 이날 부씨는 VMKA 회장 장학금 외에도 김씨로부터 추가 장학금을 받았다.

객석 맨 뒷줄을 차지한 현지 음대 학생 중 하나가 공연에 심취, 자신이 마치 지휘자가 된 듯 두 팔을 흔들며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휴식시간에 일부 베트남 관객들은 자리를 뜨기도 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킨 많은 베트남 관객들이 공연에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객석 맨 뒷줄을 차지한 현지 음대 학생 중 하나가 공연에 심취, 자신이 마치 지휘자가 된 듯 두 팔을 흔들며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휴식시간에 일부 베트남 관객들은 자리를 뜨기도 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킨 많은 베트남 관객들이 공연에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한국의 향기 오래 남을 수 있도록

2018년 미스코리아 진 김수민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VRG동화 이동호 대표, 신동민 신한베트남은행장(이상 기업부문)과 바리톤 김동규, 베트남 전통악기 단보우 연주자 레 화이 프엉(예술가 부문) 등이 제1회 베트남한인메세나 대상을 수상했다.

이번 공연을 위해 호찌민을 처음 찾은 김씨는 “클래식 음악이 처음 접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객석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웠다”면서 “경제뿐 아니라 음악 등 베트남의 예술분야 성장 가능성도 커 보인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지 음악인들은 급성장 중인 베트남이 클래식 인구 저변을 확대하면 추후 마주할지 모르는 여러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음악회를 주관한 최승우 조선오페라단장은 “일본이 수천억짜리 공항과 다리를 지어줘도 한 세기 전 오페라하우스를 마련해 준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들이 베트남인 마음에 더 깊이 남아 있다”며 “이번 음악회가 100년 뒤 베트남에 기억될 한국과 한국인 이미지 형성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찌민=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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