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이례적으로 ‘사법부로서 고개숙여 사과’
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린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민간 희생자 장환봉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그의 딸 장경자(왼쪽)씨와 아내 진점순(97)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국가 폭력으로부터 무고하게 처형당한 민간인 희생자가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억울하게 희생된 지 72년만이다. 재판부는 무죄선고 뒤 사법부로서 고개숙여 사과했고, 유족들은 서로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법원이 정부의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을 공식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희생자·유족의 명예회복과 사건 진상규명 및 특별법 제정에 큰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1형사부(부장 김정아)는 20일 형사중법정에서 열린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내란 및 국권문란죄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장환봉(당시 29세)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장씨는 1948년 10월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순천을 탈환한 국군에 체포된 뒤 군사법원에서 22일 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처형됐다.

당시 검찰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당시 전남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해있던 14연대 군인들이 여수읍내를 점령한 후 이튿날인 20일 오전 9시30분쯤 열차를 이용해 순천역에 도착하자 장씨는 이들과 동조ㆍ합세해 순천읍 일원에서 국권을 배제하고 통치의 기본질서를 교란한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장씨의 국권문란 혐의에 대해 “당시 장씨가 포고령 제2호(미군정 시기인 1945년 9월 7일 발표된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 미국육군대장의 포고) 위반 혐의를 받았지만 포고령 위반이라는 죄목은 적용 범위가 광범위해서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돼 위헌”이라며 무죄로 판단했다. 또 내란 혐의에 대해서도 “내란에 가담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검찰의 공소장과 법원의 판결서가 없어 장씨의 공소 사실이 특정되지 않아 유ㆍ무죄 판단을 하지 않고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하지만, 수백명이 며칠 사이에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 사건은 오늘날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면서 “피고인의 명예 회복 필요성이 절박하다고 인정되는 특별한 사정에 해당돼 무죄 판단이 가능하다”고 부연했다. 재판부는 함께 재심이 청구된 여순사건 희생자 신태수ㆍ이기신 2명에 대해서는 소송 과정에서 청구인이 모두 사망해 소송 절차를 종료했다.

재판부는 무죄 판결을 내린 뒤 유족에게 사죄했다. 김 판사는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배석 판사와 법원 직원들도 모두 일어나 고개 숙여 사과했다. 김 판사는 “장환봉은 좌익도 우익이 아니다. 장씨는 명예로운 철도공무원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70여년이 지나서야 잘못됐다고 선언하게 됐다”고 울먹이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어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아직도 멀고도 험난하다”며 “특별법이 제정돼 희생자와 유족이 구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70여년을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 찍혀 통한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유족은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오열했다. 장씨의 딸 장경자(75)씨는 “늦은 결정이지만 재판부의 결단을 환영한다”며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모든 분들의 무죄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여순사건재심대책위원회는 당시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받은 수천명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준비할 계획이다.

2009년 여순사건을 다룬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사 검증을 통해 “당시 군경이 장씨 등 439명의 민간인을 불법 연행해 사살했다”고 결론냈다. 장씨 유족은 과거사위원회 결과를 바탕으로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겠다”며 2011년 10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은 구체적인 범죄사실과 증거 요지가 없고 순천 탈환 후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ㆍ집행된 점 등을 이유로 장씨가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보고 지난해 3월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글ㆍ사진 순천=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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