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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안티구아 커피에선 왜 스모키한 풍미가 느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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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안티구아 커피에선 왜 스모키한 풍미가 느껴질까요

입력
2020.01.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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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화산이 남긴 재앙과 축복,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바라본 아구아 화산. 산 아래에는 대규모 커피 농장이 자리하고 있고, 산 중턱까지 가파른 언덕에는 소규모 농가들의 커피 밭이 있다. 유명한 안티구아 커피가 이 곳에서 자란다. 최상기씨 제공
안티구아에서 바라본 아구아 화산. 산 아래에는 대규모 커피 농장이 자리하고 있고, 산 중턱까지 가파른 언덕에는 소규모 농가들의 커피 밭이 있다. 유명한 안티구아 커피가 이 곳에서 자란다. 최상기씨 제공

과테말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 곳은 이웃나라인 코스타리카의 공항이었다. 늦은 밤, 이 나라의 수도 산호세 국제공항은 과테말라행 마지막 비행기편을 남겨두고 적막감이 들만큼 한산했다. 그런데, 출발 시간이 다가올 때쯤 탑승 지연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대기실은 짧은 탄식과 함께 여기저기 전화하는 소리로 잠시 웅성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자정이 지날 무렵, 어디선가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왔다. 아마도 일행 중 누군가의 생일인 듯했다.

생일 축가는 자연스럽게 다음 노래로 이어졌다. 기타와 작은 봉고 드럼 소리에 맞춰 노래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비행기를 기다리던 탑승객들의 합창으로 이어진다. 노래가 두, 세곡 넘어가면서 조용한 공항 대기실은 공연장으로 바뀌었고, 승객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했다. 게이트의 탑승 사인이 뜰 때까지 승객들의 ‘떼창’은 이어졌고, 30분가량의 흥겨운 시간은 박수로 막을 내렸다. 늦은 밤 비행기의 연발로 짜증나고 피곤한 시간을 승객들은 노래와 춤으로 반전시킨 것이다. 옆자리의 한 노파가 웃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라 비다(Pula Vida). 인생을 즐기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생(生) 철학이다.

중미 지역은 거리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와 그다지 가깝지 않은 곳이다. 멕시코 아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등의 국가들과, 카리브해의 쿠바, 자메이카, 도미니카공화국 등의 섬나라들이 이 지역에 속한다.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다소 생경한 문화에 우리와의 교역도 활발한 편이 아니어서 멀고 낯선 땅임에 분명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지인들에게 중미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다. 마약, 내전, 난민, 고대문명, 화산과 지진 등과 함께 커피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부정적인 키워드가 많음에 사뭇 놀랐다. 우리에게 중미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내전과 갱들의 마약 거래가 횡행하는 반세기 전의 풍경에서 벗어나 있지 못했다. 그만큼 낯설고 먼 땅이 카리브해 연안의 중미 국가들이다.

과테말라는 멕시코만으로 불쑥 튀어나온 유카탄 반도의 하단 부분에 위치한다. 태평양에 접해 있는 중남부 지역은 시에라마드레, 쿠추마타네스 산맥이 가로로 이어지면서 높은 고원지대를 이루고, 북쪽은 비교적 평평한 밀림 지역이다. 커피는 주로 남쪽과 서쪽의 산악 지역에서 재배된다. 과테말라는 위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나누고, 오른쪽으로는 벨리즈, 아래로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등과 맞대고 있다. 남한보다 약간 더 넓은 면적에 1,800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대표적인 중미 국가다.

비행기 출발이 늦어진 탓에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는 새벽 3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친구들의 차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해 인근 안티구아(Antigua)라는 작은 도시로 들어왔다. 어둠 속을 이동한 터라 숙소에 들어 하룻밤을 자고 일어날 때까지 이 나라의 풍경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늦은 아침, 눈뜨자 마자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졌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그 아래 초록의 산이 거대한 화폭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해발 3,760m의 아구아 화산이다. 한라산처럼 원뿔형의 단조로운 능선이 산 아래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꽤 높은 산이지만 맑은 날씨와 깨끗한 공기로 산의 정상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구아(Agua)는 ‘물’이란 뜻으로, 현지인들은 아구아 화산을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산으로 여긴다. 산 중턱부터 아래까지 널따랗게 재배되는 안티구아 커피를 품고 있어서 그럴까.

아구아 화산 옆과 뒤쪽으로 2개의 화산이 더 보인다. ‘불’이란 의미의 푸에고(Fuego) 화산과 지역 이름을 딴 아카테낭고(Acatenango) 화산이다. 안티구아에서 16㎞ 정도 떨어진 푸에고 화산은 2002년부터 화산 활동이 활발해진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재작년 6월, 이 화산은 붉은 불기둥을 내뿜으며 크게 폭발했다. 산 정상의 분화로 터져 나온 용암은 빠른 속도로 민가들을 덮쳤고, 이로 인해 산중간 주민 109명이 희생됐다. 또 인근 수십㎞ 반경의 마을에 검은 재를 뿌려 170만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며칠간 과테말라시티 공항의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되기도 했다. 과테말라에는 푸에고 화산처럼 활발한 활동이 진행중인 화산이 3개가 더 있다. 언제라도 큰 폭발로 이어질 수 있는 무서운 재앙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칠 무렵, 이름에 걸맞게 불의 산임을 보여주려는 건지 푸에고 화산의 정상부근에서 뽀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과테말라 친구들이 대뜸 붉은 용암을 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온다. 화산의 재앙에 대해 들은 직후이기도 하고, 4,000m가 넘는 푸에고 화산 꼭대기까지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테말라 친구들은 가까운 거리의 파까야(Pacaya) 화산은 우리의 백두산 높이 정도여서 말을 타고 오르면 크게 힘들지 않게 가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이 산도 2010년도에 큰 폭발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 붉은 용암을 토해내고 있어 안심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지만, 커피 농장 방문 일정들이 빠듯한 터라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에 오면 꼭 보고 가겠다는 약속과 함께.

강한 햇빛을 막아주는 차광 나무인 그라빌리아 아래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들. 가지치기로 떨어진 그라빌리아 잎과 줄기들이 잿빛 흙을 덮고 있다. 멀리 아구아 화산이 보인다. 최상기씨 제공
강한 햇빛을 막아주는 차광 나무인 그라빌리아 아래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들. 가지치기로 떨어진 그라빌리아 잎과 줄기들이 잿빛 흙을 덮고 있다. 멀리 아구아 화산이 보인다. 최상기씨 제공

고대 원시 문명 때부터 과테말라 사람들은 화산의 분출을 두려워하고, 이를 신성하게 여겼다. 티칼(Tikal) 등 마야의 고대도시가 북동부 저지대 밀림 지역에 자리잡은 이유에는 화산 폭발의 두려움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과테말라가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은 이후 2번이나 수도를 옮긴 것도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이 곳 안티구아는 과테말라의 두 번째 수도였고, 1773년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후, 현재의 과테말라시티로 수도가 옮겨졌다.

30여개의 화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불의 땅, 과테말라. 오랜 기간 동안 화산과 지진은 과테말라 사람들에게 큰 재앙으로 다가왔지만, 과테말라인들은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마치 우리가 해마다 태풍이나 홍수로 인한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런 자연재해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살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물론 화산이나 지진의 재앙은 예고없이 벼락처럼 들이닥치니 공포의 강도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과테말라인들은 지구적 재앙에 순응해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화산이 원망스러운 재앙의 대상인 것 만은 아니다.

오후에 방문한 콜롬비아란 이름의 농장(Finca Colombia)은 아구아 화산 아래에 있는 중간 크기의 커피 농장이었다.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는 커피 농장보다 식당으로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이 농장을 찾는다. 커피 밭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흙이었다. 잿빛의 고운 흙. 아프리카나 브라질에서 본 붉은색 토질과는 사뭇 다르다. 화산재와 흙이 섞여 만들어진 화산토양이다. 이 화산성 토질로 인해 안티구아 커피는 스모키한 풍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디솔이라고도 불리우는 화산재 토양은 많은 인 성분과 미네랄, 유기물을 갖고 있어서 커피를 재배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비옥한 토양 조건을 제공한다. 아울러 화산재 토양은 습기를 잘 머금고 있어 커피를 재배하는 데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공급한다.

화산이 많은 과테말라의 커피 농장이 모두 화산재 토양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 붉은 색 토양이 있는가 하면, 썩은 유기물이 층층이 쌓여 검고 기름진 흙이 있는 곳도 있다. 생산지에 따라 흙빛깔이 모두 다르게 보일만큼 다양한 토양이 존재한다. 잿빛 화산질 토양은 안티구아처럼 활화산 주변 지역에서 많이 보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품종과 가공방식의 커피라 하더라도 토양에 따른 미묘한 맛의 차이도 과테말라 커피에서 즐길 수 있는 흥미 요소가 된다.

마야문명이 두려움으로 신성하게 여겼던 화산. 그리고 수천 년간 화산과 지진의 재앙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마야인들. 하지만, 오늘날 불의 땅은 무시무시한 재앙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안티구아의 아구아 화산처럼 과테말라의 높게 솟아오른 화산들은 사람들에게 향미 좋은 커피를 생산할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을 제공했고, 화산이 토해 놓은 회색 용암들은 양질의 안티구아 커피를 재배하는 비옥한 흙을 선물했다. 이것은 커피를 재배하는 농민들뿐 아니라, 과테말라 커피를 즐기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연이 내린 축복이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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