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ㆍ1만세운동엔 어린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18년 3월 전세계를 휩쓸며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장티푸스, 콜레라와는 또 다른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식민지 조선은 속수무책 당했다.

조선에서 ‘서반아 감기’로 불리던 이 바이러스는 1918년 3월 첫 발생 이후, 9~11월에 기승을 부린 뒤 다시 1919년 1월부터 3ㆍ1운동 직전인 초봄까지 널리 퍼졌다. 당시 독감으로 전체 조선 인구의 40%인 750만명이 감염되고 사망자도 14만명에 달했다. “들녘의 벼를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 행렬이 끊이지 않을 정도”(매일신보)로 조선 팔도의 민심은 흉흉했다.

때문에 역사학계 일각에선 이 독감이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됐을 거란 주장도 나온다. 백선례 한양대 박사는 지난해 한국역사연구회에 발표한 ‘1918년 독감의 유행과 혼란에 빠진 조선사회’라는 논문에서 일제가 창궐하는 독감에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민중의 불신과 분노가 축적됐고, 이러한 감정이 3ㆍ1운동을 통해 표출됐다는 주장을 폈다.

민심의 동요가 컸던 건, 독감의 전파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학교나 관청, 회사 등 다수가 모이는 장소에서 환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사망자 중엔 20대가 많았고, 사람들의 공포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일제는 예방접종이나 마스크 보급 등 방역 활동에 소극적이었고, 풍습과 미신에 의존하는 조선인이 문제라며 책임을 돌렸다. 백 박사는 “일제를 향한 불신과 불만이 증폭된 가운데 1919년 3월 1일 일어난 시위는 가족을 잃은 경험을 공유한 다수의 조선인이 식민 당국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기에 좋은 공간을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학계에선 “전혀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순 없지만, 3ㆍ1운동 발생 배경은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인이 중첩돼 있어 어느 한 가지만 떼내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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