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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엄마인 저보다 시어머니를 좋아하는 세 살 딸이 미워요

입력
2020.03.02 04:3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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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연년생 남매(3세ㆍ2세)를 키우는 주부입니다. 지난해 둘째가 태어나고 시댁에서 큰 아이를 돌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첫째가 엄마인 저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고 따릅니다. 제 딸이지만 그런 딸이 밉습니다. 아이가 할머니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만 제 사정은 좀 달라요. 제 남편은 지방대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다닙니다.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저는 부모님 반대에도 남편만 보고 지방으로 내려와 시댁 옆에 살며 친정 도움 없이 결혼과 출산을 했습니다.

결혼 당시만해도 제 학벌을 좋아했던 시부모님은 남편이 결혼 후 저만 챙기자 저를 구박하기 시작했어요. 출산예정일 사흘 전에는 남편 생일상을, 출산 후 보름쯤 됐을 때는 시어머니 생신이니 미역국을 만들라 했습니다. 힘들어서 어렵다 하면 남편에게 욕설을 하며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폭언을 퍼부었어요. 조금이라도 시어머니 뜻과 다르면 ‘배웠다고 시부모 무시하냐’라며 화를 내셨어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시어머니 때문에 부부싸움도 많이 했어요. 그런 갈등 때문에 아이를 낳고서도 아이를 제대로 예뻐하질 못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시부모님은 첫째를 예뻐했어요. 시도 때도 없이 아이를 보러 와서 목욕하는 방법, 이 로션을 쓰는 이유 같은 사소한 것들을 꼬투리 잡아 제 탓을 했습니다. 봐달라 한 적도 없는데 둘째 낳고부터는 시어머니가 아예 큰 아이를 시댁에 데려가 하루 이틀씩 재우곤 합니다. 남들은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니 편하겠다지만 돌 지났으니 괜찮다고 라면을 먹이고, 유치는 어차피 빠진다면서 온갖 단 음식을 먹여놓고 양치질은 안 시키고, 온종일 아이가 좋아하는 TV만 틀어줍니다.

첫째는 집에서도 할머니처럼 해달라 떼를 씁니다. 아이는 제가 있던 없던 신경도 안 쓰고, 시어머니가 눈 앞에서 사라지면 악을 쓰면서 울어요. 아이를 보내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찾아와 아이를 데려가 버립니다. 아이가 할머니를 따를수록 제 딸이지만 딸이 밉고, 화가 나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어릴 때 저와 남동생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열한 살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서울로 가서 부모님과 살았는데, 부모님은 사실 저희에게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까지 장학금을 받았고, 서른 넘도록 학비를 벌어 대학원을 다녔어요. 그러다 다정다감한 남편을 만났고, 부모의 반대에 가출해서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편은 이 모든 일을 수수방관합니다. 그저 육아부담에서 벗어날 궁리만 합니다. 첫째를 시어머니에게 맡겨둬도 될지 혼란스럽습니다.

최현주(가명ㆍ33ㆍ주부)


지금 현주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부문제보다 딸에 대한 당신의 마음이에요. 고작 21개월 밖에 안된 딸에게 느끼는 서운함 같은 감정 때문에 현주씨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지요.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하지만, 인간이기에 미운 마음이 스치기도 하지요. 그렇다 해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두 돌도 안된 딸이 현주씨 내면의 불편한 감정을 건드리고 있어요. 이건 엄마들이 흔히 느끼는 감정과 다른 것 같습니다.

자식을 키우다 힘들 때면 본인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를 되짚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부모가 당신 편이 돼 줬나요. 부모에게 싫으면 싫다고 편하게 말해본 적이 있나요. 아마 당신은 이런 경험이 적었을 거예요. 어린 당신은 협조적이고, 성실하고, 잘 참는 아이였을 거예요.

당신과 부모 사이 관계는, 나쁘진 않았지만 마음을 주고 받는 건 없었을 거예요. 어렸을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감을 주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그런 경험이 부족했기에 일상생활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약자인 딸에게 화살로 돌아가는 거예요. 딸 문제가 아니라 당신 문제입니다. 이걸 알아차려야 또 하나의 비극을 막을 수 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현주씨가 부모의 반대에도 결혼한 건 무심한 부모보다 남편이 다정하고 따뜻한, ‘당신의 편’이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평생 처음 경험해본 ‘내 편’이었지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달랐어요. 비논리적이고, 막무가내이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어요. 만삭인 임산부에게 생일상을 차리라고 하고, 출산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 오라는 게 말이 됩니까. 당신은 그런 상황을 잘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현주씨는 말이 통하지 않은 시어머니,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고 무력해지고, 회피하게 되었지요.

당신이 시어머니에게 적극 대응하지 않는 건 당신이 부모로부터 감정적 수용을 받은 경험이 적어서일 수도 있어요.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영향을 많이 주었을 거예요. 부모는 아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 ‘네가 기분이 나쁠 상황이 맞아’ ‘네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 만한 일이야’ 등 수긍을 해주는 게 중요해요. 머리로는 이해한다 해도 부모로부터 인정받아야 마음을 편안히,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기 감정에 대해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요. 당신은 그런 감정적 경험이 적어 시어머니를 피했을 거예요.

당신을 시어머니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것은 남편의 책임이 큽니다. 남편이라고 해서 그 어머니를 상대할 수나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에게 ‘그냥 참고 따르자’고 했어요. 이런 남편이 당신에겐 치명적인 결정타였을 거예요. 당신이 의식하든 않든 간에 유일하다 생각했을 ‘당신의 편’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거에요. 저는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비롯됐다고 봅니다.

남편에 더해 첫째 아이까지 할머니를 따르면서 당신의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을 거예요. 자식은 소유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끈끈하게 마음이 연결된 ‘내 편’이에요. 부모와 마음이 연결된 경험이 부족했던 당신에게 아이는 둘도 없는 ‘내 편’이지요. 그 누구보다 당신과 단단한 연결돼야 하는데 시어머니를 더 좋아하는 것은 당신에게는 가혹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시어머니와는 당신이 힘들어도 참아내면 됐지만, 시어머니와 아이가 한 묶음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신으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시어머니와 다퉈서라도 딸 양육의 주도권을 되찾아야 하는데 당신은 당신 내면의 갈등 때문에 뒤로 나동그라져 버렸어요.

현주씨, 아이는 잘못이 없어요. 딸이 당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건 절대 의심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딸은 엄마와의 애착이 잘 형성돼 있습니다. 엄마를 가장 사랑하기에 할머니와도 친하게 잘 지내고, 할머니 집에서 별 걱정 없이 잠도 잘 자는 거예요.

아이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엄마가 제일 좋아도 쉽게 ‘엄마 싫어’, ‘엄마 미워’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조금만 잘해줘도 금세 할머니한테 찰싹 붙지요. 당신 딸은 ‘엄마하고 있을 때 편안해, 그러니 다른 사람하고 있어도 편하겠구나’ ‘엄마가 나를 사랑해주는구나, 다른 사람들도 나를 사랑해주겠구나’라는 믿음이 잘 형성돼 있어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양이나 숫자로 측정되는 게 아니에요. 아이 마음을 단단히 믿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양육 주도권은 당신과 남편에게 있어야 해요. 지금 당신은 해결되지 않은 내적 갈등 때문에 양육을 살짝 외면하고 있어요. 할머니와 떼어 놓으라는 게 아니라 아이를 돌볼 때 부모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특히 어릴수록 자녀의 기질적 특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아이와 부모의 기질이 다르면 부모가 알아차리고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부모는 잘 키우려는데 힘들고,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같이 있을수록 불편해 하지요.

좀 더 실질적인 팁을 드리자면 활동적이고 에너지레벨이 높은 아이라면 아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는 당신이 차분한 사람이더라도 함께 신나고 확실하게 감정을 표현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마음에 충족감을 느낄 수 있어요. ‘오냐 오냐’ 해주라는 게 아니라 기질적 특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는 겁니다. 어쩌면 딸아이는 할머니와 이런 면에서 잘 맞았을 수도 있어요. 또한 동생이 태어나면서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 짧은 시간이라도 딸과 1대1로 보내는 시간을 만드세요.

남편과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양육으로 시어머니와 문제가 있다는 점, 시어머니가 뭐라 해도 남편이 잘 버텨야 한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요구하는 게 좋습니다. 남편이 필요할 땐 시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도 해야 합니다. 당신 딸은 이미 당신 편이고,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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