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쩍 3월이 오고야 말았다. 언제나처럼 혹한을 기대했건만 겨울의 표정은 그렇게 냉엄하지 않았다. 요 며칠 최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다소 쌀쌀했지만 어쩌면 좀 성급하게도 바로 봄이 와버렸노라고 덥석 마음을 놓아도 될 것만 같다.
다만 그런 마음으로 장을 보러 가면 실망할 수 있다. 식재료, 특히 채소의 계절은 아직 겨울의 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달은 더 기다려야 봄나물의 철이 올 테고, 가장 만만할뿐더러 즉각적인 싱싱함을 줄 수 있는 오이는 고르고 골라 집어 들어도 시들고 말라 있기 일쑤다.
이런 채소 간절기에 뭔가 좀 다른 선택은 없을까. 엄청난 자신감으로 ‘이거, 이걸 당장 다들 먹읍시다’라고 할만한 건 솔직히 없지만 ‘저 이런 것도 있는데 한 번쯤 고려해보시죠…?’라고 옆으로 슬쩍 들이밀만한 채소는 몇몇 있다.
대표적인 게 콜리플라워이다. 콜리플라워는 브로콜리처럼 브라시카 올레라케아 속의 식물로 채소 선반에서도 대체로 나란히 팔린다. 낯설게 다가오는 데 비해 기본 조리법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어서 일단 안면을 트고 나면 다양한 식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일단 기본 손질 요령은 브로콜리와 흡사해서 큰 송이에 과도를 집어 넣어 작은 송이를 균일한 크기로 솎아 낸다는 느낌으로 잘라낸다. 다만 브로콜리와 달리 콜리플라워는 양배추처럼 큰 송이를 4등분해서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미 잘린 단면을 보고 칼로 송이를 소분한다.
브로콜리처럼 콜리플라워도 일종의 싹이 뭉쳐 하나의 큰 송이를 이루는 구조이지만 브로콜리와 비교할 때 알갱이가 훨씬 더 작을뿐더러 깔깔하다. 따라서 생으로 먹으면 질감이 유쾌하지도 않지만 사레 들리기 쉬우므로 익혀 먹기를 권한다.
기본은 찜이다. 양수 냄비나 팬 등에 물을 채우고 손질한 콜리플라워를 찜기에 담아 올린다. 그대로 약불에 올려 물이 끓을락말락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올라오는 수증기로 7~8분 삶는다. 콜리플라워는 파스타가 아니지만 알 덴테(심이 살짝 씹힐 정도의 상태)의 미덕을 빌어와 부드럽게 씹히되 끝에 살짝 저항이 남아 있도록 삶는 것이 좋다.
완전히 식혀 두고 먹어도 좋지만 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을 때 사과식초를 바탕으로 만든 비니그레트 (사과식초와 올리브기름을 3:1로 섞고 다진 마늘 한 쪽 분량, 소금과 후추로 맛을 낸다)에 버무리면 이 시기에 기대할 수 있는 수준 치고는 제법 상큼한 채소 음식이 된다.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버무려야 콜리플라워가 드레싱을 더 잘 흡수하며 식초의 향도 한결 더 잘 살아난다.
◇샐러드 맛 높여주는 콜리플라워
찐 콜리플라워는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질감의 대조를 이루는 다른 재료 몇 가지와 함께 버무려 업그레이드된 샐러드를 만들 수도 있다. 빵가루 3큰술과 완숙으로 삶은 계란 1개를 준비한다.
팬에 버터를 둘러 녹이고 계란은 잘게 다진다. 버터가 거품을 내며 녹아 끓으면 빵가루를 더해 노릇해질 때까지 5분 가량 볶는다. 콜리플라워를 더해 온도만 올려준다는 느낌으로 1분 더 볶은 뒤 레몬즙과 삶은 계란을 더해 한데 버무려 마무리한다. 다진 파슬리 잎이나 케이퍼 등을 더해도 좋고, 아예 계란 샐러드에 콜리플라워를 더해준다는 느낌으로 접근해도 좋다.
삶은 계란 서너 개를 굵게 썰고 찐 콜리플라워, 볶은 빵가루 등을 더해 마요네즈로 버무린다. 부드러운 계란에 바삭한 빵가루, 알 덴테의 느낌이 살짝 남아 있는 콜리플라워가 심심치 않은 질감의 대조를 준다.
마지막으로 통조림 참치로 만드는 샐러드에 찐 콜리플라워를 더해 맛을 낼 수도 있다. 계란 샐러드와 접근 방식은 같되 통조림 참치(먼저 기름을 꼭 짜준다. 통조림을 딴 뒤 뚜껑을 완전히 떼어내지 않고 끝만 살짝 남겨둔다. 손으로 뚜껑을 힘주어 누르면서 캔을 기울이면 기름만 빠져 나온다)와 콜리플라워를 무게 기준 3:1의 비율로 맞춰 섞고, 샐러리와 양파, 쪽파 등을 적당히 더해 마요네즈에 버무린다. 흰 빵도 좋지만 통밀이 조금 섞인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면 한결 더 맛있다.
콜리플라워의 흰색이 식욕을 돋우지 않는다면 볶아서 진한 색깔과 함께 불맛을 불어 넣을 수도 있다. 콜리플라워로 불맛을 낸다니, 믿기지 않는다고? 불맛이란 크게 식재료의 당이나 아미노산이 반응하는 캐러멜화 또는 마이야르 반응의 결과인데, 콜리플라워는 당 함유량이 높아 고온에 조리하면 색깔과 단맛이 확 살아난다. 다듬어낸 콜리플라워를 1.5㎝ 크기로 좀 더 잘게 썰고, 올리브기름 1큰술과 마늘을 작은 공기에 한데 섞어 둔다. 넉넉한 크기의 볶음팬(지름 25㎝ 안팎)을 중불에 올리고 기름을 둘러 반짝이기 시작할 때까지 달군 뒤 소금 ½작은술과 후추 ⅛작은술을 솔솔 뿌리고 잘 섞는다.
콜리플라워를 팬 전체에 고르게 깔아주고는 5분에 한 번씩 뒤적이며 15분 동안 한 차례 볶는다. 그리고 콜리플라워가 부드러워지면서 진한 갈색이 돌 때까지 8~10분 더 볶는다. 고르게 익을 수 있도록 1~2분마다 한번씩 살포시 뒤적여 준다.
미리 준비한 마늘 기름을 뿌려 30초 더 볶아 마무리한 뒤 소금과 후추로 입맛따라 간하고 접시에 담는다. 레몬즙이나 식초를 흩뿌려 주면 신맛이 잘 살아난 단맛에 균형을 잡아 준다.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산과 기름을 조금 넉넉하게 잡아 준 뒤 삶은 파스타에 함께 버무리면 차게 먹어도 맛있는 샐러드가 된다.
호두를 굵게 다져 마른 프라이팬에 볶아 더하면 한결 더 맛있고, 채식을 계획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파르미지아노 치즈를 살아 솔솔 뿌려 마무리한다. 그밖에 아몬드나 피스타치오, 건포도 등을 더해도 좋다. 한편 볶기가 성가시다면 손질한 콜리플라워를 대접에 담고 식용유와 소금을 솔솔 뿌려 잘 버무린 뒤 에어프라이어에 15분 돌리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고르게 익도록 5분마다 한 번씩 흔들어 준다.
◇카레, 쿠스쿠스, 튀김요리까지 섭렵하는 콜리플라워
찌든 볶거나 굽든 콜리플라워는 여러 요리의 바탕으로 쓸 수 있는데 특히 채식 식단에 유용하다. 살펴 보았듯 당 함유량이 높아 캐러멜화로 잘 끌어내면 강렬한 맛 자체는 물론 부드러움과 아삭함 중간의 질감 또한 만족감을 내는 덕분이다. 차가운 파스타에 잘 어울린다면 따뜻하게도 먹을 수 있다. 아무래도 콜리플라워 자체가 자잘한 덩이로 나뉘어 조리되었으니 스파게티처럼 긴 면보다는 펜네처럼 짧은 면이 좋다.
팔팔 끓는 소금물에 펜네처럼 짧은 파스타를 삶고, 익는 사이 다른 팬에 올리브기름을 둘러 마늘을 볶고 통 혹은 병조림 토마토와 익힌 콜리플라워 등을 같이 끓여 소스를 만든다. 강낭콩, 병아리콩 등을 통조림으로 갖춰 두면 손쉽게 식물성 단백질을 보충해 먹을 수 있다.
맛과 질감 외에도 콜리플라워에게는 향신료를 굉장히 잘 받아들인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올리브 기름 같은 식물성 지방과 함께 활용하면 쉽게 물리지 않는, 표정이 또렷하고도 다채로운 채식 식단을 꾸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가장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향신료라면 역시 카레가 있다. 인스턴트 커리에 캐러멜화가 될 때까지 볶은 콜리플라워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당근이나 양파만으로 끓인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음식이 된다. 물론 ‘카레’와 ‘커리’는 다른 음식이라고 분류하는 게 맞을 정도로 맛의 표정이 다르지만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더해도 콜리플라워는 제 역할을 해낸다.
생으로는 안 먹는 게 바람직할 정도로 콜리플라워는 깔깔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각각의 알갱이를 분리해내면 좁쌀 같은 곡물과 비슷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콜리플라워를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에서 즐겨 먹는 알갱이 파스타인 쿠스쿠스와 같은 방식으로 조리하거나, 더 나아가 냄비에 물을 자작하게 붓고 삶아 밥 대신 먹을 수도 있다.
푸드 프로세서나 칼로 콜리플라워를 0.5㎝ 이하의 알갱이로 자잘하게 갈거나 다진 다음 물을 붓고 12~15분쯤 삶은 뒤 포크로 잘 섞어 주고 뚜껑을 덮어 5분 동안 뜸들인다. 좀 더 공을 들이고 싶다면 마늘과 샬롯 등을 올리브기름에 볶아 맛을 낸 뒤 콜리플라워를 더하고, 채식 여부에 따라 닭육수로 삶는다. 소금과 후추로, 다진 파슬리 잎이나 쪽파 등으로 마무리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가능성의 끝판왕으로 콜리플라워 튀김이 있다. 왜 굳이 튀김이 끝판왕이어야 하는가. 조리 자체는 복잡할 게 없지만 아무래도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기름의 처리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무릅쓸 수 있다면 콜리플라워 튀김은 모든 채소를 통틀어 가장 만족스러운 채식 요리가 될 수 있다.
더치오븐 등 두텁고 깊은 솥 혹은 냄비에 기름을 절반쯤 담아 중불에 올려 180℃로 달구고, 튀김옷은 옥수수전분과 소금에 차가운 물을 더해 묽은 풀처럼 준비한다. 기름이 목표 온도에 이르면 튀김옷에 한 입 크기로 썬 콜리플라워를 담갔다가 흐르는 반죽을 잘 털어내고 담가 6분 가량 튀긴다.
튀긴 콜리플라워를 체로 건져 종이 행주에 올리고 나머지를 반죽에 담갔다가 튀기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한다, 열효율이 떨어지므로 기름을 빽빽이 채우도록 콜리플라워를 한꺼번에 많이 넣고 튀기지 않는다. 표면의 지글거림이 완전히 가시고 손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까지 식으면 먹는다. 웬만한 튀김이라면 소금 혹은 초간장만 곁들여도 충분하지만 콜리플라워 튀김이라면 초고추장, 더 나아가 케첩이나 설탕, 참기름 등을 더해 흉내 낸 치킨 양념을 찍어 먹는 게 더 맛있다. 말하자면 치킨에 대응하는 채소 튀김인데, 맥주 안주로 먹는다면 과음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으니 주의하자.
◇콜리플라워와 브로콜리 사이, 로마네스코
콜리플라워와 브로콜리가 채소 선반에서 이웃해 나란히 팔리고 있는데, 사실 그 사이가 딱 제자리인 채소가 있다. 둘을 반반씩 닮은 것 같은 로마네스코이다. 연한 브로콜리색에 질감은 콜리플라워에 더 가까운 로마네스코는 무엇보다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프랙털이 가장 잘 그리고 정확하게 구현된 자연의 산물로 유명하다. 실제로 연구에 의해 로마네스코의 프랙탈 구조가 피보나치 수열을 바탕으로 삼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콜리플라워와 같은 요령으로 조리한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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