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좀 맛있는 것 없을까?’ 늘 하는 질문이지만 특히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 두기’가 화두일 때는 고민이 더욱 많아진다.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면서도 택배 같은 수단을 활용해 즐길 수 있는 음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 크게 세 가지 조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유통 과정에서 최대한 영향을 받지 않는 음식이어야 한다. 전국이 일일 택배 생활권인데다 아직 싸늘한 초봄이니 부패나 손실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식품 안전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음으로는 먹기 쉬운 게 좋다. 인터넷 주문만으로 전국의 산해진미를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지금은 조리 자체, 아니 그 생각만으로 심신이 피로해지는 때다. 이왕이면 포장만 뜯어 바로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좋다. 마지막으로 양보다 질에 집중하는 음식이 바람직하다. 재택근무다 뭐다 해서 신체 활동이 부쩍 줄어드는데 포만감이 장점인 음식만 계속 찾다 보면 원치 않은 체중 증가라는 슬픔이 찾아올 수 있다.
이 세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염장 햄이다. 우리에겐 사각형의 가공육류로 각인돼 있지만, 실제로 햄이란 돼지의 부위를 의미한다. 돼지 족의 윗부분인 넓적다리 가운데서도 뒷다리를 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앞ㆍ뒷다리를 같은 부위처럼 취급하면서 불고기나 수육, 찌개 등의 재료로 쓰지만 서양에서는 통째로 소금에 절여 공기 중에서 건조시켜 가공육을 만든다. 가열을 하지 않고 만들어 그대로 먹을 수 있으므로 ‘생 햄’이라 부르는데, 사실 많은 양의 소금에 절이는 처리 자체가 조리 행위다. 이 조리법의 핵심은 미생물의 발생 방지이니 ‘생’이라는 접두사만 보고 ‘고기를 날로 먹어도 되는가’라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생 햄은 많은 양의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공기 중에서 건조시키므로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두드러진다. 또렷한 살코기와 비계로 구분된다는 점이 보통 요리에 쓸 때는 단점일 수도 있지만 가공 과정을 거치면 장점으로 바뀐다. 각자의 맛이 또렷한 두 켜로 나뉘기 때문이다. 생 햄은 아주 얇게 저며 진공 포장해 판매하니 유통 과정도 안전한데다가 포장을 뜯어 바로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시기에 좀 맛있는 것, 혹은 별미를 찾고 있다면 생 햄으로 눈을 돌려볼 만하다.
◇염장 햄 대표 ‘프로슈토’와 ‘하몽’
식문화권마다 나름의 생 햄들이 있다. 이탈리아의 프로슈토가 대표적이다. ‘미리(pro)+수분을 뽑아내다(exsuctus)’라는 라틴어 어원에서 알 수 있듯, 프로슈토는 일단 염장으로 가공을 시작한다. 넓적다리를 통으로 소금에 절인 뒤 서서히 무게를 늘려가며 눌러 수분을 뽑아낸 다음 두 달 동안 둔다. 그리고 여러 번 씻어 염분을 최대한 걷어낸 뒤 직사광선이 닿지 않으며 통기가 잘 되는 곳에 매달아 말린다. 기후나 햄의 크기 등에 따라 가공 기간이 달라지지만, 완전히 건조가 끝나 상품화가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18개월은 걸린다.
고온 다습한 기후에서는 햄 건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도 프로슈토가 파르마나 산 다니엘 등 북부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의 특산물인 이유다. 그러나 프로슈토라는 명칭 자체는 원산지와 무관하게 붙일 수 있다. 따라서 잠깐 한눈을 팔면 맛을 보려고 계획했던 것과 다른 제품을 사는 불상사를 겪을 수 있다. ‘가짜’라고 낙인 찍기는 냉혹하지만, 대표적인 예가 미국산 프로슈토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프로슈토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뒷면 딱지를 훑어보면 원산지가 미국인 제품이 많다. 이탈리아 프로슈토가 아니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량생산 제품이므로 안타깝게도 맛은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의 프로슈토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치즈나 와인처럼 프로슈토 또한 원산지 명칭 보호(PDO,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제도로 특산물 취급을 받는다. 따라서 양대 대표 지역인 파르마와 산 다니엘에서 나오는 프로슈토는 ‘Prosciutto di Parma/San Daniele, Italy, PDO’라는 문구를 포장에 달고 나오니 참고하자. 파르마와 산 다니엘의 프로슈토는 가공육에 흔히 쓰는 아질산염 같은 첨가물을 쓰지 않고 오로지 소금과 돼지 넓적다리만을 써서 만들어야 한다고 규제한다. 아질산염은 아주 적은 양만을 쓰기 때문에 식품에 쓰인다고 해서 덮어 놓고 인체에 해롭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첨가물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특산물에 대한 이탈리아만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프로슈토만큼이나 유명한 생 햄이 스페인의 하몽이다. ‘하몽’이라는 말 자체가 스페인어로 ‘햄’인데 돼지 종류, 숙성 기간, 사육 방식에 따라 등급을 나눠 이름을 달리 붙인다. 최상급은 ‘하몽 이베리코 드 베요타(Jamón Ibérico de Bellota)’다. 자유롭게 풀어 놓아 도토리를 먹인 이베리코 흑돼지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부가 명칭 없이 ‘하몽 이베리코’라고만 쓰여 있는 건 배합 사료를 먹여 키운 흑돼지로 만든 제품이다. 베요타와 일반 하몽 이베리코 사이에 ‘레체보(Jamón Ibérico de Recebo)’ 등급도 있다.
하몽은 프로슈토와 달리 설탕을 첨가해 단맛이 조금 더 강하며 기본적으로 아질산염 등의 첨가물도 사용한다. 2주간의 염장을 마친 뒤 씻어 소금기를 걷어내고 6~18개월 매달아 말려 만든다. ‘하몽 세라노(Jamon Serrano)’ ‘레세르바(Reserva)’ ‘쿠라도(Curado)’ ’엑스트라(extra)’ 등의 이름이 붙어 나오는 제품은 흑돼지로 만들지 않는다. 일반 백돼지로 만든 햄인데 수식어와 품질은 크게 상관이 없다.
◇빵이나 과일, 봄나물과도 잘 어울려
염장 햄은 어떻게 먹어야 맛있을까.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 소량을 판매하는 데서 헤아릴 수 있듯, 맛이 강렬하므로 그 자체만 먹으면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굴비를 한 번 생각해보자. 소금에 짭짤하게 절인 것이니 살만 먹기보다 밥과 함께 먹으면 간이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탄수화물의 단맛이 어우러져 전체적인 만족도가 한층 높아진다. 염장 햄 역시 원리는 같다. 적은 양을 맛의 중심에 두고 탄수화물, 과일 등으로 에워싸주면 맛이 더 좋아지고 균형도 잡힌다. 굴비에 밥이라면 염장 햄에는 빵일 텐데, 희고 부드러운 식빵류보다 통밀이나 호밀이 섞인 빵이 더 잘 어울린다. 구수하면서도 지방을 많이 쓰지 않아 적절히 씹는 맛이 있는 빵 말이다. 이런 빵과 염장 햄을 천천히 조금씩 씹으면 햄의 풍성한 지방 위로 짠맛과 고기 본래의 단맛, 빵의 구수한 맛 등이 활개를 치는 걸 느낄 수 있다. 최소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맛의 경험을 누리는 것이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시니’라 불리는 가늘고 길며 바삭한 브레드스틱과 프로슈토를 함께 먹는다.
단맛과 대조를 이룬다는 차원에서 염장 햄을 과일과 짝지어 먹으면 더욱 맛있다. 염장 햄을 떠올리면 동시에 머릿속 어딘가에서 치고 나올 정도로 익숙해진 조합이다. 멜론이 지정 파트너처럼 프로슈토를 졸졸 쫓아다니지만 굳이 여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덜 익은 멜론을 프로슈토와 같이 산다면 맛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나, 아니면 무처럼 서걱거리는 상태에서 함께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고 즙이 많으면서도 신맛을 적당히 갖춘 과일이라면 뭐든 좋다. 초봄인 3월이라면 어차피 철을 안 타는 파인애플이나 맛이 제법 든 딸기도 괜찮다. 한여름이라면 복숭아도 잘 어울리는데,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병이나 통조림 제품을 곁들여도 괜찮다. 생과일보다 더 잘 익은 걸 가공한데다가 부드러우면서도 아삭함이 살짝 남아 있어 생 햄과 제법 잘 어울린다.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방식의 염장 햄 먹는 요령이다. 만약 모험심 또는 창의력을 발휘해보고 싶다면 한식에도 자리는 있다. ‘이타카’ ‘주반’ 등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김태윤 오너 셰프는 이제는 문을 닫은 ‘7pm’에서 프로슈토를 허리에 두른 두릅을 선보인 적이 있다. 두릅 특유의 살짝 미끌거리는 질감이 매끄러운 프로슈토와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핵심은 역시 쌉쌀함이었다. 적은 존재감으로도 확실한 균형을 잡아주므로 봄나물의 미덕인 쌉쌀함은 생 햄과 아주 잘 어울린다. 두릅처럼 직접 둘러 먹을 수 있는 봄나물이 아니라면 생 햄으로 양념장(드레싱)을 만들어 무쳐먹을 수도 있다. 기름기 없는 팬에 몇 쪽을 담아 약불에 올리면 익으며 비계가 녹아 기름이 배어 나온다. 이를 공기 등에 옮겨 담고 식초나 레몬즙으로 신맛, 약간의 간장으로 짠맛과 감칠맛을 맞춰준다. 그리고 다진 마늘이나 파 등을 더하면 고추나물 등 쌉쌀한 봄나물에 어울리는 양념장이 된다. 기름을 녹여 내고 남은 햄 쪼가리는 구워 바삭해졌을 테니 잘게 부숴 버무린 나물 위에 솔솔 뿌린다.
◇염장 햄에는 스파클링 와인이 제격
아무래도 와인 없이 염장 햄을 이야기할 순 없다. ‘신토불이’의 개념을 확대 해석해 프로슈토에는 이탈리아, 하몽에는 스페인산 와인을 일단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같은 봄에는 스파클링 와인이 가장 좋은 짝이다. 탄산과 두드러지는 신맛, 적은 단맛으로 염장 햄의 풍성함이 느끼함으로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잘라준다.
◇파스타에는 구안찰레나 판체타
이탈리아에는 프로슈토 외에도 다양한 가공육이 있는데, 아무래도 ‘구안찰레’와 ‘판체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느끼함의 끝판왕’처럼 알려진 카르보나라 파스타(흔히 스파게티를 생각하자면 비슷한 굵기에 가운데에 구멍이 난 부카티니가 카르보나라의 제 짝이다)의 핵심 재료이기 때문이다. 돼지 볼살을 염장해 만든 구안찰레가 원조인데, 대용으로 삼겹살로 만든 판체타를 써도 된다. 판체타를 익힌 기름에 계란 노른자와 파르미지아노 치즈를 섞어 소스를 만든다. 면을 막 삶아 뜨거울 때 소스에 버무려 먹는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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