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 문고본이 재탄생하고 있다. ‘숏폼’(짧은 형식) 시대의 인문학 매체로서다. 인문학은 묵직한 사유가 본령이다. 가벼운 틀과 불화하기 쉽다. 성공할 수 있을까.

최근 문학과지성사가 새 인문 시리즈 ‘채석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채석장은 독일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표현에서 빌려 왔다. 시리즈 첫 책 ‘자본에 대한 노트’에서 클루게는 마르크스 저작 ‘자본’을 영화화하려 했던 옛 소련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미완의 계획’을 ‘상상의 채석장’이라 불렀다.

이번에 발간된 1차분은 3권이다. 시리즈 이름이 시사하듯, 어떤 결론에 이른 완성된 걸작들은 아니다. ‘자본에 대한 노트’는 에이젠슈타인이 1920년대에 쓴 작업 노트와, 여기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영화 ‘이데올로기적 고대로부터 온 소식’(2008)을 만든 클루게가 이 작품을 비엔날레에 전시하려 따로 준비한 소책자(2015)를 엮었다.

‘아카이브 취향’은 여성과 빈민, 대중 행동 등을 연구해 온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의 에세이다. 18세기 형사 사건 아카이브를 통해 들은 ‘역사가 되기 이전’이나 ‘역사가 될 수 없는’ 목소리들 앞에서 한 역사가가 느낀 불안과 매혹이 담겼다. ‘정크스페이스|미래 도시’는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의 전위적 에세이 ‘정크스페이스’와, 그의 사유에서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찾으려 시도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의 에세이 ‘미래 도시’를 묶은 책이다.

출간을 기다리는 ‘새로운 극우주의의 양상’, ‘저항하는 여자들’, ‘무대’,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등도 논쟁적인 정치ㆍ사회ㆍ예술 에세이다. ‘잠재적 보석’인 원석이라 할 만하다. “나올 책들은 청중을 발견하지 못한 거친 선언문일 수도, 파편적 사유가 담긴 불완전한 기획일 수도,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누군가의 일기일 수도 있다”고 출판사는 소개했다.

문고본 형태인 책은 작고 얇다. 113~188쪽 길이에 가격은 1만1,000~1만2,000원이다. 그러나 여느 문고본처럼 내용이 가볍거나 쉽지는 않다. 사고 유도를 위한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줄인 게 아니다. 짧을 수밖에 없다. 문고본 형식을 취하면서도 정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절충하려 한 셈이다. 실제 “작은 책들이 지금 여기의 달라진 조건 속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기를, 더 많은 사유와 논쟁을 위한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출판사는 밝혔다.

인문학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2015년 초부터 교유서가가 번역해 펴내 오고 있는 ‘첫 단추 시리즈’와 같은 범주일 수 있겠다. 1995년부터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나오고 있는 ‘아주 짧은 인문서’ 총서가 원저인데, 매년 20개 정도의 주제를 다뤄온 결과 지금은 총권이 600권을 넘는다. 저명한 학자들이 저자로 참여, 독자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각 인문학 주제에 대한 균형 잡히고 공신력 있는 기초 지식을 제공한다. 국내에는 철학, 역사, 수사학, 파시즘, 혁명, 마르크스, 포퓰리즘, 행동경제학 등 근 40개의 주제가 소개됐다.

채석장에 비하면 올해 초 민음사가 창간한 인문 잡지 ‘한편’은 보다 친절하고 온건하게 진화한 문고본 기획이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 편”이 모토다. 입체감이 강점이다. 200자 원고지 30매 안팎 분량인 짧은 글들의 주제가 일관적이다. 창간호는 사회학, 정치학, 문화인류학, 인구학, 철학, 미학 등 여러 분야를 연구하는 필자 10명의, ‘세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한데 모아놨다. 초판 3,000부를 1주일 만에 팔아치우며 학제적 소통뿐 아니라 대중적 인문학의 가능성까지 보여줬다. 연초부터 넉 달 간격으로 매년 3회 발행될 예정인데 5, 9월호 주제는 ‘인플루언서’와 ‘환상’이다.

‘한편’ 기획이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는 건 선배들이 연상돼서다. 어쨌든 신선한 방식으로 흥미로운 테마를 다룬다는 발상이 3년 전 잇달아 시작된 문고본 시리즈와 비슷하다. 위고, 코난북스, 제철소 등 1인 출판사 3곳이 공동 기획해 2017년 9월 출범시킨 ‘아무튼 시리즈’는 개인적 취향을 세게 반영한 젊은 저자의 짧은 에세이 모음이다. 술, 요가, 비건, 발레, 트위터, 양말, 택시, 딱따구리, 스웨터 등 아이템이 중구난방 자유로운 건 그래서다.

구성원이 3명인 작은 출판사 플레이타임이 같은 해 11월부터 번역해 국내에 소개 중인 ‘오브젝트 레슨스’ 시리즈도 유사한 아이디어의 결과다. 영국 블룸즈버리 출판사가 2015년 개시한 이 시리즈는 하나의 오브젝트를 한 권 주제로 정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글쓰기를 통해 대상의 이면을 독특하게 풀어낸다. 호텔, 쓰레기, 패스워드, 유리가 한국어판이 맨 먼저 선택한 소재다.

본래 문고본은 소설 같은 문학이 많았다. 오래 전, 주머니가 가벼운 청소년들에게는 값싼 문고본이 세계 문학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고급화ㆍ컬러화하는 단행본들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던 문고본은 도서정가제 도입으로 책값이 버거워지는 와중에 전자책으로 얻을 수 없는 책의 물성(物性)을 포기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발판 삼아 2017년쯤부터 재기를 모색한다. 민음사의 ‘쏜살문고’, 마음산책의 ‘마음산문고’, 유유의 ‘땅콩문고’ 등이 부활을 이끈 주역이다.

물론 인문학에 문고본 발간은 얼마간 고육책 성격이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인터넷 세계에 짧은 글들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갈수록 독자의 호흡은 짧아지고 텍스트 피로감이 쌓인다. 관심과 유행도 예전보다 훨씬 빨리 바뀐다. 적응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아무리 숏폼 시대라도 ‘숏텀’(짧은 수명)은 사유가 깊고 길어야 할 인문학과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문학보다 형편이 어렵다.

돌파구는 저변의 확대일 수밖에 없다. 저렴과 접근성, 휴대성만 장점으로 삼던 과거와의 단절은 필수다. ‘채석장’도, ‘한편’도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다. 소장과 과시에 적합해지려면 책도 우선 매력적이어야 한다. 시리즈 이름의 거친 느낌과 달리 채석장의 파스텔톤 커버는 곱다. ‘작고 예쁜 책’ 실험이 인문학 도약의 관건이 될지는 비단 출판계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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