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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폭력적인 아빠라도 좋은데, 그런 저 때문에 이혼 못하는 엄마

입력
2020.03.30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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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일러스트=박구원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일러스트=박구원기자

제 고민은 아빠예요. 아빠는 같이 살지만 남처럼 지내요. 제가 여섯 살 때 아빠가 가출했어요. 한참 뒤에 연락이 와서 가끔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때리고 심한 욕설로 겁을 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한번은 영화관에 갔다 제가 원하는 인형이 있는 인형뽑기 기계를 하고 싶다고 하자 아빠는 귀찮다며 앞에 있는 기계에 돈을 넣었고, 실패하자 “너 때문에 돈만 날렸다”라며 제 머리를 주먹으로 계속 때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로 도망쳐서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러던 아빠는 제가 5학년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년 정도는 잘 지냈어요. 하지만 그 뒤 다시 엄마와 싸우기 시작했고, 엄마와 저를 심하게 때려 경찰에 신고한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엄마와 아빠는 1년 가까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요.

한번은 가족끼리 찜질방에 가려다 제가 싫다고 한 적이 있어요. 엄마는 이유를 물으며 짜증냈어요. 그냥 싫다고 티격태격하다 언성이 높아지자 아빠가 저랑 엄마를 때렸고, 엄마가 경찰에 신고를 했어요. 제가 엄마와 다투면 아빠는 늘 끼어들어 폭력을 휘둘러요. 아빠와 아빠 가족들은 이게 다 저 때문이라 해요. 제가 태어나면서 아빠 엄마 사이가 안 좋아졌대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아빠는 가출했을 때 바람도 피웠어요. 아빠 휴대폰을 빌려 썼을 때 여자들이 보낸 메시지가 많았어요. 아빠는 최근에도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가 하루 종일 소식이 없습니다. 회사일로 집에 못 온다고만 합니다.

그래도 저는 아빠가 같이 있는 게 나은 것 같아요. 가끔 먼저 말도 붙이고 학원에 데리러 와달라고도 해요. 아빠는 약속할 때는 지킬 듯 하다 단 한번도 지키질 않아요. 말로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면서 실제론 제게 관심이 없어요.

엄마, 외갓집 가족들은 저를 많이 아껴줍니다. 여행도 다니고 유치원이나 학교 행사 때마다 늘 오세요. 외할아버지는 제가 뭘 잘 하거나 하면 ‘네 덕분에 할아버지가 기쁘다’는 말씀도 해주세요. 엄마는 바른 생활인이에요. 제가 엄마를 닮았으면 공부도 잘하고 부지런하고, 뭐든 척척 잘해냈을 텐데 저는 아빠를 닮아서 덤벙대고 게으릅니다.

아빠를 닮은 게 너무 싫지만, 아빠가 가출하는 것보다 같이 사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어요. 엄마는 이혼하고 싶지만 저 때문에 못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해야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까요

이서영(가명ㆍ13ㆍ중학생)



서영아. 네 사연을 읽고 너의 아픔이 깊이 와 닿아서 마음이 무척 아팠단다. 네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웠을지 나는 너무나 잘 안단다. 아빠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하는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깊이 이해한다. 그 동안 꿋꿋하게 잘 버텨줘서, 잘 자라줘서 참 고맙구나.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어른으로서 너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먼저 너의 부모의 불화가 너의 탓이 아니라는 거란다. 아이들은 부모가 싸우면 ‘나 때문에 그렇구나’ 죄책감을 가지기 쉽단다. ‘내가 성적이 좋았더라면’ ‘내가 짜증을 내지 않았더라면’ 같은 생각을 해.

하지만 발단이 뭐가 됐든 부모의 불화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자기 일을 잘 해내지 못해서 생기는 거란다. 인간은 잘못과 실수를 하고, 후회와 반성을 하고, 그러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성장을 한단다.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데, 그 일이 부모의 미성숙함을 건드려서 스스로 충동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게 하는 만드는 게 문제란다.

네가 찜질방에 갑자기 가기 싫다 한 것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지. 그럴 때 부모는 ‘모처럼 다 같이 가보고 싶었는데 같이 가면 안될까’라고 좋게 권해보고, 정 싫다면 다음에 가자고 하면 된단다. 짜증을 낸다든지 하는 아이의 행동이 잘 한 행동은 아니지. 그런데 그걸 두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건 명백한 부모의 잘못이란다. 부모는 어른이잖니. 물론 네가 잘못한 면도 있겠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억울함이 생긴단다.

인형뽑기도 넌 너무 억울했을 거야. 마음에 드는 인형이 있어서 딱 한번 해보겠다고 한 것뿐인데 아빠가 네 탓만 하는 건 부모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어. 너의 요구가 설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도 “뽑기 힘들 수 있는데, 안 나오더라도 너무 실망은 하지 말자”라고 하는 게 아빠로서, 어른으로서 태도인 거지. 아빠가 화를 낸 건 네 탓이 아니라, 감정조절이 잘 안되고 난폭하고 공격적인 아빠 잘못이란다. 자신의 감정밖에 모르는 사람인 거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서영아. 네가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누가 누굴 때릴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거야. 부모라 해도, 연인이라 해도 때려서는 안 되는 거야. ‘맞을 만한 이유’라는 건 없단다. ‘잘못을 해서 맞을만하다’라는 건 틀린 말이야. 아이가 잘못했으면 잘못을 고치도록 도와주고, 어른이면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거란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어. 네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빠, 엄마, 아니 그 어느 누구라도 너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걸 꼭 알아야 한다.

서영이 아빠는 ‘네가 내 성질을 건드렸으니깐 내가 때렸다’라고 생각할 거야. 아이에게 문제의 원인과 죄책감을 떠넘기는 나쁜 방법이지. 나는 아빠가 너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과 표현하고 행하는 건 다른 것이란다. 말로는 ‘너밖에 없다’지만 정작 자식은 그렇게 못 느낀다면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란다.

서영아. ‘나 때문에 우리 부모가 불행하다’라는 죄책감은 네게도 좋지 않아. 너는 바르고 좋은 아이인데도 아빠의 미성숙한 언행 때문에 너는 너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민과 감정에 빠져 있어. 다시 말하지만 네 탓이 아니란다. 감정이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아빠 잘못이야. 네가 어떻게 하든 아빠는 너를 잘 대해주지 못했을 거 같구나.

나는 ‘이런 아빠라도 집에 있는 게 좋다’라는 데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단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그런 존재라는 걸, 부모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단다. 나쁜 부모라도 부모가 옆에 있기를 원하는 건 본능적인 거란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이혼을 못해서 불행한 게 아닌지 고민하는 네 모습이 너무나 가엾고 안타까웠단다. 그런 건 어른의 몫인데 왜 어린 네가, 잘못 하나 없는 네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몹시 마음이 무겁단다.

서영아. 너도 알다시피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단다. 아빠로 인한 부정적인 자극을 당장 없애긴 어렵지만 그런 자극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할 지는 네가 결정할 수 있단다. 그러기 위해서 내면의 심리적 자원을 키우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너 자신의 존귀함은 아빠가 너를 함부로 대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네게 그런 아빠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순 없단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말할 지 몰라도, 부모란 존재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나는 잘 안단다. 그래도 곁에만 있어 주면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가냘픈 기대만으로도 필요한 게 부모라는 존재야. 아빠와 너랑 떨어진다 해도 어차피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이어질 거야. 부모님 이혼 문제는 부모님이 정하도록 해도 괜찮을 거 같구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서영아. 아빠와 비슷한 네 모습을 싫다고 했지만 너와 아빠는 다른 사람이야. 덤벙대고 게으른 것은 병이 아니야. 조금씩 고쳐나갈 부분이지. 그런 걸로 아빠와 너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어. 내가 걱정되는 건 네가 실제 덤벙대느냐가 아니라 너가 너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점이야. 부모의 긍정적 측면을 보면서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상을 만들어가는데, 부정적인 아빠의 모습을 너에게 투영하는 것은 너에게 좋지 않단다. 서영아. 내가 보기에 넌 별같이 반짝거리는 아이란다. 너무 기특하고 대견한 아이니까 엄마와 의논을 많이 하면서 너의 삶을 잘 꾸려가면 된단다.

또 너는 엄마를 어른이라기보다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드리렴. 엄마는 네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 순간 마음이 아프겠지만 자기에게 마음을 열어준 딸을 더 좋아할 것 같구나. 엄마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건 대견하지만 그건 어른인 엄마의 몫으로 돌려줘도 된단다.

서영아. 네 나이에는 ‘나는 좀 멋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내 꿈을 이루려면 뭘 해보는 게 좋을까’ ‘나는 얼마나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같은 생각에 부풀어야 한단다. 너는 존재만으로도 반짝이는 아이야. 아빠의 문제는 아빠에게 맡겨두고, 아빠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을 거야. 너의 소중한 앞날을 온 힘을 다해 응원할게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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