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30)] 여행자에게 팬데믹이란 2편
이거라도 써야 하나. 칠레의 한 생활용품점에서 발견한 ‘초강력’ 방진 마스크. 일반 마스크를 사려고 20여회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푸콘의 모든 여행자 서비스가 중단됐어. 호텔, 여행사, 레스토랑 모두 말이야. 당신을 받아줄 수 없게 되었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칠레 중남부에 위치한 관광 도시 푸콘 전체가 닫혔다는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답변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럴 수 있지?’ 다행히 인근 비야리카에 숙소를 잡았으니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행 가이드북은 푸콘을 일컬어 365일 여행자가 차고 넘치니, 멀지 않은 비야리카가 지내기 좋은 대안이라 안내하고 있다.

칠레 중남부의 비야리카 화산. 산봉우리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활화산인데 잠시 활동이 중단된 듯 고요했다.

푸콘 시내는 원형 교차로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진입부터 뭔가 을씨년스럽다. 3월 20일, ‘푸콘’임을 알리는 대형 간판이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패션숍도, 레스토랑도, 여행사도 마을의 98% 이상의 상점이 영업 중지 상태다. 볕 좋은 금요일, 점심을 즐길 법한 레스토랑의 테라스도 텅 비어 있다. 마침 눈에 띈 여행사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는다고 할 뿐, 다른 설명은 없다. 코로나는 여행자의 천국인 푸콘을 죽은 도시로 만든 듯했다.

푸콘의 명패는 리모델링 중일까? 진입 자체를 막고 싶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푸콘의 한 복합 여행사. 열심히 노를 젓는 건 광고 조형물만 보일 뿐, 인기척이 없다.
생활용품과 건축자재를 판매하는 ‘소디막’ 마트. 며칠 사이 규율이 바뀐 듯했다. 비야리카 소디막에선 직원과 손님 모두 1.5m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우울한 마음으로 마트에 갔다. 쇼핑이란 참 웃기다. 할수록 없던 활기가 솟는다. 한 달 체류를 예고하듯 손 크게 장을 봤다. 면역력 강화를 위해 영양이 듬뿍 담긴 재료를 중심으로 샀다.

마스크가 있는지 둘러보았으나 역시나 없다. 사실 며칠 전부터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기 위해 20회 정도 시도한 바 있다. 백전백패 후 생활용품을 주로 판매하는 ‘소디막’ 마트를 방문한 적도 있다. 코로나에 더 취약하다고 판단한 탕탕 어르신은 그곳에서 마스크를 찾겠노라 의지를 불태웠다. 특수한 작업을 할 때 쓰는 방진 마스크만 남아 있었다.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등장하는 베인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야리카의 소디막에도 들렸으나 문 앞에서 출입 인원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미 현지인이 번호표를 든 채 따분한 눈초리로 줄을 서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마스크를 보내 달라’고 농담으로 남긴 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친구의 살가움이 스쳐 갔다.

“언니, 마스크는 수량과 관계없이 국제 우편 금지 품목이 되었대요.”

그냥 집으로 가자.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는 6명 이상 지낼 수 있는, 우리에겐 쓸데없이 큰 단독주택이다. 침대 4개, 욕실 2개다. 가격 대비 최상의 선택이었다. 예약을 받은 이는 70대 주인의 아들, ‘진짜 호스트’인 어머니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고 미리 조언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나.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거리를 두라는 손짓을 하며 뒷걸음질쳤다.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한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린 야생 곰이 되었다. 그녀는 도망치며 소리쳤다.

“마노(mano), 마노!”

손을 씻으라는 의미다. 차분히 손을 씻은 후 영어를 하는 그녀의 친구 패티를 통해 경찰에 진술하듯 우리가 출국한 날짜와 여행한 도시, 칠레 체류 기간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녀는 그제야 웃어 보였다. 정원에 해먹도 있고, 주변을 걷기에도 좋고, 안전하니까 좀 더 머무는 걸 고려해 보라는 홍보까지 곁들였다. 사람이 곧 바이러스가 된 이상, 그녀의 경계가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좀 미웠다.

비야리카의 에어비앤비 숙소. 당분간 통째로 쓰는 우리 집이다. 탕탕과 싸워도 따로 잘 침대가 많았다.
죽지 않아! 고백하자면, 냉장고 밖에 이것보다 2배가량의 먹을 거리가 있다. 혹 한국 소주가 보이는지? 빙고!
루프톱 텐트가 탑재된 산타페 4WD. 장기간 칠레와 아르헨티나 여행을 위해 구입한 차량이다. 자체 수입도 올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널 이리 급하게 처분해야 할 줄은 몰랐어.

세계 탐험이 중단된 우린 ‘인터넷 월드’로 직진했다. 주칠레 대한민국 대사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산티아고발 항공 노선을 공지하고 있었다. 상담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3월 21일 현재, 산티아고 공항에서 탑승 가능한 목적지로 애틀랜타를 비롯한 미주 지역과 유럽의 파리 및 마드리드를 안내 받았다. 명랑한 목소리에 드디어 귀국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것도 잠시, 이어지는 말을 듣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아직 공식적인 소식은 없는데, 비야리카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 자체가 막힐 수도 있어요. 서두르셔야 해요.”

뚜뚜뚜. 휴가에 가까웠던 자발적 칩거가 감금으로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다. 서두르고 싶지만, 우리도 상황이란 게 있었다. 지난해 4월 1년여의 장기 여행을 계획할 당시, 우린 여행사 ‘집월드(ZipWorld)’를 통해 모든 항공권을 예약했다. 일종의 오픈 티켓 패키지다. 행선지를 정하고 예약 날짜는 박아두되, 탑승 5일 전까지 변경 요청을 하면 수수료가 무료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을 거쳐 스리랑카, 호주, 뉴칼레도니아 등 대륙을 건너는 지구 한 바퀴 여행에 합당한 선택이었다.

이 패키지 항공권에서 아직 쓰지 않은 카드가 있었다. 갈라파고스와 파리행 티켓이다. 하늘길이 점점 끊기고 있다는 소식이 여러 채널을 통해 전해졌다. 갈라파고스행 항공권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집월드 여행사에 전화해 산티아고에서 파리를 거쳐 한국으로 가는 항공권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물었다. 기다려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때마침 토요일이었다.

산티아고에서 내 이름으로 구입한 산타페 차량도 처분해야 했다. 차량 중개 업체인 ‘수지(SUZI)’에 문의했다. 지역별 이동 제한 정보를 알려 준 후, 공항도 곧 문도 닫을 거라 확신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차는 어떻게? 중개 업체에서 보관했다가 이 사태가 끝난 뒤 대신 팔아줄 수 있다고 했다. 이 요청을 언제까지 받아줄 수 있을지 자신도 모른다는 답변을 덧붙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한 건가. 미묘한 심리전인가. 단 한 가지 조언은 명료했다.

“집으로 가려면 지금 당장 돌아가. 아니면 1~3개월간 작은 마을에 박혀 있어.”

지난해 세계 여행을 떠나기 전 만든 명함.
한국을 출발하기 전 명함과 스티커를 동시 제작했다. 특히 스티커는 우리의 여행 증명이자 전 세계 방랑객과 연대감을 느끼게 한 매개였다.
뒤편의 해먹보다 정원에 가끔 놀러 오는 네게 더 관심이 많다. ‘담황목따오기’다.
코로나 걱정 없이 곤히 잠든 네가 부러워. 너와도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숙소에서 두 밤을 보냈다. 주인장 마리나는 전날 시내에 나갔다가(숙소는 시내에서 약 7km 떨어져 있다) 텅텅 빈 거리 풍경에 놀란 가슴을 안고 돌아온 모양이다. 사람 코빼기도 보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집안에만 콕 박혀 있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잔소리처럼 몇 마디 늘어놓는다. 정원의 널찍한 테이블에서 햇빛 좀 쐬라고, ‘그놈의’ 해먹에서 왜 즐기지 않느냐고.

떠돌이인 우린 사실 ‘방콕’ 전문가다. 집안에서 할 일은 무척 많다. 거의 7개월 치 사진을 정리 못한 상태요, 일기에 가까운 여행 가계부에도 빈칸이 많았다. 캠핑 여행으로 사계절 옷이 제멋대로 처박힌 배낭도 정리가 필요했다. 개인 취향이지만 백팩에 나라별 국기를 꿰매는 작업도 해야 한다. 서류와 영수증 정리도 남았다. 은행 잔고도 체크해야 하는데, 이곳 와이파이 속도로는 시간만 축낼 것 같다. 정상적인 책상에 노트북을 펴고 원고를 쓸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멀미를 참아가며 쓰는 수고에 비하면 백 번 감사할 일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마리나는 이 ‘방콕 전문가’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이제 직업을 밝힐 때인가. 나는 글을 쓰고, 남편은 사진작가이며 밀린 원고를 쓰느라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장은 넉넉히 봐 놓았고, 세탁 제안은 고맙다는 뜻도 밝혔다. 한국을 출발하기 전 내가 직접 그리고 만든 명함은 뜻밖의 효과를 발휘했다. 마리나는 자기에게도 그림 한 점을 그려달라며 흰 종이를 팔랑거렸다. 세탁비와 맞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날 뻔했다.

3월 21일, 일요일인 오늘도 날씨는 맑음이다. 숙소의 마스코트인 애완견 로렌조는 늘 볕이 잘드는 우리집 문 앞에 누워 있다. 역시 네 팔자가 상팔자로구나. 일단 여행사의 답변이 앞길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월요일이 되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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