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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생각을 가장 떳떳하고 효율적으로 훔치는 법

입력
2020.05.18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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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온종일 생각을 한다. 그것은 점심 메뉴나 내일 외출할 옷을 고르는 것처럼 사소한 것일 수 있고, 오래도록 골똘히 생각하던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적어도 사람은 깨어 있으면 무슨 생각인가를 해야만 한다. 생각이 없음을 자각하는 것조차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영역은 대체로 내가 보고 듣는 생활의 한도 내에 있다. 먹어 보지 않은 메뉴를 점심으로 고려하거나 입어 보지 않은 옷을 입으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축구를 하면 축구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고 낚시를 하면 낚시의 본질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직업과 관련되거나 전문 분야일수록 생각은 더 깊게 나아간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므로 골똘히 생각하는 화두는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나 의학의 범주에 있다. 모든 사람에게서 오래 생각한 사유가 더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생각은 글로 쓰면 더 명확해진다. 하지만 좋은 글이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점심 메뉴를 몇 날 며칠 고민해서 고르는 글은 좋은 글이기 어렵다. 지나치게 보편적인 화두이기도 하지만,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에서 사람을 감탄시키는 통찰이 들어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좋은 글은 좋은 생각에서 나오고, 좋은 생각은 대체로 그 사람이 오래도록 궁구하고 탐구한 사유에서 나온다.

한 사람의 가장 좋은 생각을 담아낸 것이 한 권의 책이다. 저자는 책에 가장 좋은 생각이 담기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하루에 깊은 생각을 백 개쯤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서너 가지의 화두를 골똘히 생각하고, 나머지는 점심 메뉴처럼 일상적인 일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뻗어낸 생각의 방향이 특별하거나 깊을수록 책은 좋은 것이 된다. 나는 병원에서 고민한 내용으로 몇 권의 책을 냈다. 그것이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생각한 내용이었음이 컸다.

다른 책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다. 법조계나 우주비행사의 회고록 같은 것도 특별하지만, 생경한 학문이나 노동 현장의 에세이도 내가 겪어보지 못해 특별하다. 한번은 평생 활자체만 연구한 사람의 책을 읽었다. 이전에는 활자의 모양만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깊고 넓은 세계가 있는지 미처 알 수 없었다. 이제 모든 활자의 모양마저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근래에는 친한 초상화가가 발간 예정인 책 원고를 가지고 왔다. 나는 원고를 읽고 다소간 놀랐다. 그곳에는 초상의 역사와 얼굴을 도화지에 옮기는 오묘함과 직업 화가의 세계까지, 초상화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렇게 깊고 체계적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리한 활자를 읽고서야 그가 평생 초상화를 생각해 왔음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생각하기 불가능했던 생각이었다. 내가 그 생각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관련 자료와 문헌을 찾아보며 평상시에도 골똘히 생각을 해야만 한다. 사실상 다른 일을 하는 내가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책은 그 작업을 마치고 정리해 가장 재미있는 방식으로 알려준다. 매번 독서를 마치면 너무나 손쉽게 정상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중 고전이야말로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혁신적인 작품을 일컫는다. 그곳에는 인류 최초로 꿈의 분석에 접근하거나, 생각하는 나의 존재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이라고 적혀 있다. 책은 이렇게 다른 인류가 했던 생각을 모조리 정리해서 알려준다.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남이 골똘히 해놓은 생각을 가장 효율적으로 훔치는 방법이다. 인류가 발명한 다른 방법으로는 아직 이렇게 생각을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인류는 지금도 활자로 공부한다. 역시 독서에는 실은 없고 득만 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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