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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은 광대로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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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은 광대로 살 겁니다”

입력
2020.05.25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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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의 창시자인 김덕수 명인이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룬 음악극 ‘김덕수전’을 연습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사물놀이의 창시자인 김덕수 명인이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룬 음악극 ‘김덕수전’을 연습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나는 광대였다. 내 아버지도 광대였다.”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68)가 스스로 정리한 ‘63년 예인 인생’이다. 남사당이었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새미(인간 탑 꼭대기에서 춤 추는 무동)로 난장을 튼 다섯 살 때부터 고희를 앞둔 지금까지 걸판지게 놀았다. 사물(장구ㆍ꽹과리ㆍ북ㆍ징)과 함께한 삶 자체가 ‘신명’이었다.

그런 김덕수의 삶이 무대에 오른다. 28일부터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연되는 음악극 ‘김덕수전(傳)’이다. 김덕수의 일대기가 곧 20세기 한국 문화예술사인 만큼 공연계 대가들이 뭉쳤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가 극작과 제작을, 연극계 대가 박근형이 연출을 맡았다. 16일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 만난 김덕수는 “1년간 구술 작업을 하면서 성찰의 시간이 됐다”며 “위인도 아닌데 내 이름 붙은 공연을 하려니 중압감도 느낀다”고 말했다.

남사당 데뷔 이후인 여섯 살 무렵의 김덕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남사당 데뷔 이후인 여섯 살 무렵의 김덕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억이 존재하는 서너 살 무렵부터 그의 손엔 장구채가 들려 있었다. 왼손잡이인 것도 남사당 어른들과 마주 앉아 장구를 따라 치면서 생긴 습관 때문이다. 그 시절 흥겨운 놀음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마을 공터에 무대를 세우고 장터가 열리면 남사당이 나서 흥을 돋울 차례죠. 어린 내가 묘기를 부리면 어른들이 감탄하면서 박수 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재미 없었으면 지금까지 광대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남사당 입문 2년 만인 1959년 일곱 살 나이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장구신동’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공연하느라 학교에 못 가서 퇴학당하기도 했어요. 4ㆍ19 혁명 직후 어느 농악대회에서 1등상을 받아 들고는 별 두 개 달린 군인에게 인사하러 갔어요. 어느 학교 다니냐고 묻길래 ‘잘렸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군요. 그러고선 다음날 복학했어요. 하마터면 초등학교도 졸업 못할 뻔했지. 하하.”

1960년대 국악예술학교(중ㆍ고교 과정)를 다니며 한국민속가무예술단과 리틀엔젤스 소속으로 해외 무대까지 누볐다. “1년에 절반 이상 집 떠나 생활하던 유랑 인생”이었다. 고되고 힘들었다. “아이고, 만날 도망다녔어요. 인문계 가고 싶어서. 친구들 교복이 어찌나 부럽던지요. 학구열도 좀 남달랐고요. 하지만 공연이 저를 붙잡은 거지요.” 9남매 중 아버지의 길을 이어간 건 오직 김덕수, 한 명이다.

1978년 공간 사랑에서 초연한 사물놀이 공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왼쪽부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8년 공간 사랑에서 초연한 사물놀이 공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왼쪽부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7년 사물놀이 20주년 공연에서 장구를 연주하는 김덕수. 사물놀이가 탄생한 지 어느새 42년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7년 사물놀이 20주년 공연에서 장구를 연주하는 김덕수. 사물놀이가 탄생한 지 어느새 42년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음악 외적인 요인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재주가 있으니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쳤는데, 그 풍물은 대학가 반정부 시위대 맨 앞 줄을 장식하기 일쑤였다. 때는 유신시대, 탁 트인 마당에서 흥을 돋울라치면 ‘빨갱이’로 내몰려 잡혀갈 각오도 해야 했다. 1978년 ‘사물놀이’가 태어난 배경이다.

“말하자면 실내 연주가 가능한 타악기 앙상블을 구성한 거예요. 시대에 맞춰 재구성한 남사당이었던 셈이죠. 그때만 해도 꽹과리, 북, 장구, 징은 음악으로 쳐주지도 않았어요. 눈으로 즐기던 연희를 귀로 감상하는 음악으로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했죠.” 그렇게 만들어진 사물놀이는 김덕수와 동의어가 됐다.

김덕수가 가장 뜻 깊었던 공연으로 1987년 이한열 열사 추모 음악극 ‘바람맞이’를 꼽는 이유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88서울올림픽 홍보를 위해 해외 연주를 할 때였어요. 미국과 유럽을 돌고 동남아만 남았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더군요.” 거리에선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사물놀이를 하고, 이애주 선생이 물고문과 불고문을 춤으로 표현했어요. 백기완 선생이 ‘바람맞이’란 이름을 지어주셨고요. 대학로 연우극장에서 공연했는데,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관객들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김덕수가 저항의 의미로 수염을 기른 것도 그때부터다.

김덕수는 ‘김덕수전’ 개막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지난 14일 5ㆍ18 40주기 추모 음악극 ‘사랑이여’ 무대에 올라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연주를 했다. 이한호 기자
김덕수는 ‘김덕수전’ 개막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지난 14일 5ㆍ18 40주기 추모 음악극 ‘사랑이여’ 무대에 올라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연주를 했다. 이한호 기자
김덕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왜 그랬을까’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김덕수전’ 공연으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김덕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왜 그랬을까’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김덕수전’ 공연으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사물놀이는 이후 계속 발을 넓혀 나갔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팝스타 스티비 원더 등 사물놀이의 신명에 반한 음악인들과 협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싸이 같은 대중가수들과도 어울렸다. 2010년에는 디지털 기술과 접목한 사물놀이 공연까지 선보였다.

김덕수가 힘을 쏟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제2의 김덕수 만들기’다. 1998년 한예종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로 부임해 2018년 퇴임할 때까지 커리큘럼 개발과 교재 제작 등 전통연희의 이론화에 매진했다. 외국인 제자도 여럿이다. 그는 “전통을 이어가는 방법은 교육밖에 없다”며 “청년 예술인들이 세계로 나아가 그 지역 문화와 결합된 자체 콘텐츠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한국의 전통문화가 세계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에겐 “영원한 광대로 무대에 서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다. “다섯 살 때부터 제가 해 온 일은 결국 본질적으로 똑같아요. 시대에 따라 포장만 바뀌었을 뿐, 신명은 절대 변하지 않죠.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은 광대로 살 겁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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