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에 어둠이 깔렸다. 공장이 작업을 멈추고 잠드는 시간이었다. 불청객 같은 안개가 스며들고 나면 이 쇠락한 도시는 쥐와 까마귀의 차지였다. 주민들은 옷깃을 여미고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를 달아나듯 걸었다. 막힌 하수구가 역류해 도로에 썩은 물이 흘러들었다.”
하승민 작가의 소설 ‘콘크리트’의 배경은 가상의 도시 안덕이다. 쇠락한 도시 안덕에서 연쇄 방화,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현장의 단서들은 범인의 최종 목표가 지역 유지인 장정호임을 암시한다. 위협을 느낀 장정호는 이혼 뒤 고향 안덕으로 내려온 검사 출신 조카 세휘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음모와 배신, 집착과 욕망이 뒤엉킨 변두리 해안도시에 대한 묘사는 당장이라도 물비린내가 코를 찌를 듯 세밀하다. 힘차게 밀어붙이는 서사의 힘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문장의 흡인력은 정유정, 김언수, 천명관의 초창기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가 낯선 작가 ‘하승민’의 책을 낸 이유다.
그런데 하승민이란 이 작가, 이게 첫 장편이다. ‘문청’이었던 적도 없고 당연히 신춘문예나 공모전 같은 곳에 출품해본 적도 없다. 글 써본 경험이라곤 대학 시절 상금 100만원 벌어보려고 교내 공모전에다 단편소설 쓴 게 전부다. 대학 졸업 뒤 네이버 전신인 NHN에 입사해 10년 넘게 회사원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회사 일이 지겨웠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회사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일찍 인정받았고 남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간편결제 업계 쪽에서는 이름도 얻었다. 2018년 더 큰 기회를 얻기 위해 이직도 했다. 일 자체는 재미있었는데, 문제는 퇴근 뒤에도 머리가 계속 온(ON) 상태로 유지됐다는 것. ‘수면제’가 필요했다. “퇴근 뒤 머리 식히려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1~2시간 정도 집중해서 쓰고 나면 잠이 잘 오더라고요.”
소설을 써본 적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 김언수의 ‘뜨거운 피’를 꺼내 1장 분량을 필사했다. 필사한 양에 맞춰 1일 1시간 1장씩, 1년을 썼다.
그렇다고 막 쓴 건 아니다. 작가로는 ‘초짜’여도 직딩으로선 엄연한 10여년의 경력자. 네이버 때 게임회사 ‘한게임’에서 일할 적에 시장 테스트 업무를 진행한 적이 있다. 새 게임에 대한 사용자 조사를 하면서 2년간 2,000여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다양한 직업군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은 소설 속 인물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
사건을 풀어가는 전직 검사 세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인숙 같은 인물들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도 그때 경험이 작용했다. “처음엔 두 인물 다 남성으로 생각하고 썼어요. 그렇게 쓰다 중간쯤에 보니, 제 소설도 결국 어디선가 본 듯한 진부한 스릴러 소설이더라고요. 그래서 성별을 바꿨더니 정말 다른 소설이 됐어요.”
소설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방대한 플롯, 사건, 인물 등은 ‘꼼꼼한 직장인의 상징’ 엑셀로 정리했다. 소설을 완성한 뒤 발표한 곳을 찾을 때도 ‘시장조사’를 통해 황금가지가 운영하는 장르소설 연재 플랫폼 ‘브릿G’를 골랐다. 연재 석 달 만에 황금가지에서 “책을 내자”는 연락이 왔다. “완성도가 너무 뛰어나 노련한 기성 작가가 필명으로 썼겠거니 생각했는데, 젊은 신인이어서 깜짝 놀랐다”는 게 황금가지 쪽 얘기다.
책으로 냅시다, 연락 받았을 때 하승민 작가는 중요 미팅 직전이었다. 새 직장에서도 큰 사업을 성사시켰고, 새로 설립되는 법인의 임원 자리까지 제안받았다. 모든 조직원의 꿈이랄 수 있는 그 문턱에서 그냥 사표를 냈다. “일을 정말 좋아했고 열심해 했지만, 문득 회사원으로서 제가 할 만큼은 다 했다 싶었어요. 삶의 한 챕터가 마무리됐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렇다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되는 걸까. “쓰고 있는 것은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하 작가는 의외로 회사원 시절과 작가 시절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회사원 시절엔 자신이 기획개발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면 희열을 느꼈다. 작가로서의 꿈도 그렇다. “제 소설을 읽었거나 읽고 계신 분을 마주치게 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게 작가로서의 꿈이죠.”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