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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광릉요강꽃아, 정녕 사라진단 말이냐

입력
2020.06.01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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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요강꽃. 조영학 작가 제공
광릉요강꽃. 조영학 작가 제공

화천의 비수구미 가는 길은 험했다. 산길로 접어들어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달리고도 끝내는 2㎞ 가까이 산길을 걸어야 했다. 비수구미(秘水九美),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파로호 물이 초입까지 닿아 있고 마을 한가운데로 맑은 계곡 물도 흐른다. 서너 가구가 동화처럼 모여 사는 마을, 이름처럼 비밀스러운 곳이다.

K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광릉요강꽃을 보기 위해서다. 1급 멸종 위기 식물 중에서도 단연 선두를 차지하는 꽃, 야생 상태라면 전국적으로 몇 백 촉밖에 남지 않았다니 일반인이 만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꽃이다. 그 꽃이 이곳 비수구미에 900여촉이 개화하였다고 하여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35년 전 평화의 댐 공사현장에서 죽어가는 꽃 대여섯 촉을 가져와 뒷산에 심고 번식에 공을 들인 덕이다. 전문가들도 번번이 실패하는 현실이고 보면 대단한 노력이고 결실이 아닐 수 없다.

K는 꽃이 멸종 위기에 몰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애초에 생존 전략을 잘못 세운 겁니다. 꽃은 대부분 꿀과 향으로 매개 곤충을 유혹하는데 이 친구는 대신 외모와 덩치를 키웠어요. 곤충들이 인근 꽃에 놀러 왔다가 크고 화려한 외모에 홀려 구경 오기는 해도 빈도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꿀도 향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다른 꽃들과 달리 곤충이 꽃 안으로 들어가야 수분이 되는데 입구가 작아 나비 같은 아이들은 들어가지도 못해요. 건방지게 손님까지 골라 받아들인 겁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타화수정이라 그 과정을 반복하고도 난초과답게 균류의 도움을 받아야 발아가 가능한데 그게 또 어렵고 복잡해요. 결국 수정을 마치고도 발아율이 2% 수준에 머물고 말죠. 자가수정도 인공번식도 어려운 이유가 다 있답니다.” 귀한 꽃이라 남획이 심한 줄은 알았지만 멸종 위기가 그 이유만은 아닌 모양이다.

“사슴 같은 꽃이네요, 현실을 외면하고 높디높은 이상만 꿈꾸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있으니. 아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아니 꽃이여.” 노천명의 시까지 들먹이며 놀려 보지만 자기 신세 자기가 볶았다는 얘기가 불현듯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만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을 거예요.” 며칠 전 만난 작가 P가 그렇게 선언했다. 얼마 전 번역서와 에세이집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해 마음속으로 반가워하던 터였다.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이 바닥을 떠나는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에세이집 발표가 오히려 화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독서 인구가 줄면서 출간은 오히려 작가들의 가난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글을 준비하며 보낸 시간이 전부 비용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칼럼은요? 얼마 전에 시작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것도 그만뒀어요. 더 이상 돈 때문에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P는 취직을 하든, 자격증에 도전하든 뭐든 하겠다고 했다. 사실 출판 생태계가 어려워지면서 생계 위협을 받는 건 나 같은 번역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 내에 멸종할 직업 1순위, 번역가. 지난 해 어느 설문조사에서 나온 결론이 그랬다. 인공 번역기의 발전이 놀라워서라지만 번역 출간 자체가 번역가들의 노동을 착취해야 가능해진 지 이미 오래 전이다.

꽃의 멸종은 언제나 꽃 한 송이 뽑혀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P에게는 비구수미 같은 보호 공간도 없었다. 생태계가 혹독하다지만 자신이 좋아 걸어온 길 누구를 원망하기도 민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화교환수가 사라지고 활판인쇄공이 멸종하지 않았던가. 다만, 수많은 P들이 멸종한 후에도 이 사회가 건강할 수 있을까? P들이 멸종하는 생태계는 괜찮은 걸까? 광릉아, 광릉요강꽃아, 어찌하여 좋은 길 다 마다하고 멸종의 길을 택하였더냐?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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