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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톺아보기] 오렌지가 어뤤지?

입력
2020.06.03 04: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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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KTX도 없고 새마을호도 귀했던 2000년 대 초반, 무궁화호에는 특실이 있었다. 유아칸 특실에는 사방이 유리로 막힌 공놀이방이 있었는데, 유리창 정면에는 시설 이용 안내로 ‘위드-펀’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누구를 위해 한글로 ‘위드-펀’을 썼을까? 한국인이 본다면 ‘위드–펀’보다는 ‘재미있게 놀자!’가 더 쉽다. 영어권 사람이라면 한글을 못 읽을 수도 있을뿐더러, 설령 읽어 냈다고 해도 ‘with fun’이라 볼 가능성도 낮다. 결과적으로 ‘위드-펀’은 진공 상태처럼, 누구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그림 기호가 되고 말았다.

오래전 일이지만, 일명 ‘어뤤지’ 사건도 있다. 교육 정책가가 공적인 자리에서 오렌지가 아니라 ‘어뤤지’가 맞다고 했던 인터뷰를 기억한다. 그 근거로, 미국에서 유학할 때 오렌지가 안 통해서 ‘어뤤지’로 소통했다는 일화를 들었다. 이 사건은 공인이 외래어와 외국어를 구분하지 못한 예시로 남게 되었다. 오렌지는 한국어 사전에 실린 우리말이다. 문물과 제도가 국경을 넘는 인류 역사에서 버스, 택시, 주스처럼 외래어가 없는 언어는 이 세상에 없다. 심지어 영어권에서 온 사람이라도 한국에 오면 오렌지라 해야 오렌지를 살 수 있다. 그런데 영어권에 가서 한국어가 된 외래어를 사용했으니 영어권 화자가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어뤤지’도 ‘위드-펀’처럼 영어 발음에 가깝게 적으려 한 표기일 뿐이다.

말은 무색, 무취, 무미의 진공 상태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다. 말이 오가는 곳에는 말하는 이와 들을 이가 있고, 그들의 관계가 있고, 말하는 목적과 듣는 태도가 있다. 말에 휘둘리지 말고 말의 주인이 되자. 그러려면 자신이 지금 ‘누구에게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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