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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불행 쯤이야..."김연수가 복원한 백석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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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불행 쯤이야..."김연수가 복원한 백석의 삶

입력
2020.07.02 10: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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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블랙리스트 올랐던 작가의 삶과 겹쳐


해방 이후 북한에 남은 백석은 1962년 5월 11일 ‘문학신문’에 실린 ‘프로이드주의-쉬파리의 행장’을 끝으로?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1996년 숨을 거두기까지 말년의 대부분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보냈다.

해방 이후 북한에 남은 백석은 1962년 5월 11일 ‘문학신문’에 실린 ‘프로이드주의-쉬파리의 행장’을 끝으로?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1996년 숨을 거두기까지 말년의 대부분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보냈다.


1945년 광복 이후 백석은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스승 조만식의 러시아 통역비서 일을 맡기 위해 평양으로 향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만식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면서 비서 일을 접게 되고, 이후 10여년간 번역에만 매진한다. 이 기간 백석이 번역한 러시아 및 각국의 소설과 시만 1년에 10권에 달했다.

아동문학 영역에서도 잠시 활동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1959년 당성(黨性)이 약한 인민을 지방 생산 현장으로 내려 보내던 이른바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 배정된다. 창작과 번역 등 문학적 활동은 중단한 채, 말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농사를 짓다가 1996년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근대시인으로 늘 꼽히지만, 정작 백석의 말년 행보에 대해 남한에 알려지는 것은 이 정도다. 전해 내려오는 시집 역시 100부 한정판으로 찍은 ‘사슴’에 불과하다. 분단으로 더 이상 작품을 볼 수 없게 된 작가들의 이름을 외자면 한나절이 걸릴 테지만, 그 중에서도 백석은 유독 ‘만일 북한에 남지 않았다면’이라는 상상이 뼈아픈 작가다. 누구보다 시 쓰기를 사랑했던 이가, 별안간 시를 전혀 쓰지 않는(혹은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심경을 제대로 아는 이조차 없기 때문이다.


일곱해의 마지막김연수 지음문학동네 발행248쪽ㆍ1만3,500원

일곱해의 마지막김연수 지음문학동네 발행248쪽ㆍ1만3,500원


김연수의 신작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은 바로 이 시기,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분단 이후 백석의 삶을 소설적 상상력을 보태 복원한다. 러시아 문학 번역으로 겨우 생계를 잇던 백석이 다시 시를 쓰기로 마음 먹은 1957년부터 7년 간의 삶을 다룬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소설로,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지워진 인물들의 생을 되살리는데 탁월함을 보여온 작가의 장기가 어김없이 발휘된다.

학계는 백석이 분단 이후 여러 이유로 시 창작의 동력을 상실했을 것으로 조심스레 추정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백석은 적어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시를 쓰고자 한 인물이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다시 시를 쓰기로 결심하지만, “들으라는 대로 듣고, 보라는 대로 봐야만 하고, 말하라는 대로 말해야만” 했던 분단 이후 북한에서, 시인이란 ‘공산주의 당의 생각을 받아쓰는 자’에 불과했다. 만물에서 비애와 고독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시인의 자질은 그곳에서 쓸모가 없었다.


김연수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김연수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은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의 여성 작가에게 조선어로 쓴 자신의 시를 보냈다. 모든 폐허에서도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고, 유배되어 가는 기차 안에서도 창 밖 나무 위에 쌓이는 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김연수는 백석을 “언어를 모르는 불행과 병 앞에서 시인의 문장이 속수무책”이라 할지라도, “시대에 좌절할지언정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운명에 불행해지고 병들더라도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김연수 역시 소설가 데뷔 전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고, 백석만큼이나 유려하고도 탁월하게 한국어를 사용하는 작가 중 하나다. 무엇보다 지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번역지원사업 등에서 배제됐다. 시대의 광풍에 휩쓸렸지만, 영원히 서정의 상징으로 남게 된 지난 세기 시인의 삶이 작가에게는 더없이 가깝게 느껴졌으리라. 그러니 이런 문장은, 백석의 것이기도 하고 김연수의 것이기도 할 것이다.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의 세계였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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