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55>성폭력 생존자 김지은
“살려고 택한 미투는 또 다른 의미의 죽음”
‘조배죽’
김지은(35)씨가 올해 2월 낸 책 ‘김지은입니다’에 나오는 단어다. ‘안희정 조직’의 단골 건배사였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회식 자리에서도 충성을 외치는 전근대적인 상하수직 문화의 일단이다. 그러니 ‘미투’란 곧 ‘조배죽’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였다.
책에는 그가 수행비서로서 수행해야 했던 비상식적인 임무들도 기록돼있다. 지사가 신기 편한 각도로 구두를 놓아두어야 하는 건 약과다. 지사 지인의 김장용 고춧가루를 구해다 주고, 밥을 먹다가도 지사의 부인이 좋아하는 빵집에 가서 빵을 사왔다. 심지어 사비로 감당해야 했다. 평소 ‘슈트발’이 안 선다며 옷 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 지사의 취향 탓에 모든 소지품을 대신 지니고 다녀야 한 건 또 어떤가.
-‘김지은입니다’에 보면 현역 단체장의 수행비서로 이행했던 충격적인 일들이 나와요. 그런 관계 문화에 비춰 비서가 피해를 입은 즉시 미투를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상사에게 폭력과 폭언을 당했다고 남자들이 바로 회사를 관두지 않아요. 그런데 다들 성폭력은 다르다고 말해요. 제게 노동은 생존 그 자체였어요. 많을 땐 한 주에 140시간, 통상적으로는 130시간을 근무했어요. 새벽 출근과 잦은 야근, 그리고 노동자로서 부당하게 느꼈던 업무 지시를 이행했던 것조차 모두 생존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어요. 그런데 미투를 하면 결국 저의 노동은 사라져버려요. 제가 지키고 싶은 저의 전부인 ‘노동자 김지은’으로서의 삶을 걸고 미투를 해야만 했어요. 살기 위해 저는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을 선택해야 한 거죠. 그 분야에서 쌓아온 저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만 했어요.”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라는 표현에서 미투로 짊어지게 될 압박과 부담, 바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돼요. 미투 이전에 짐작했던 것보다 실제 미투 이후의 상황이 더 위협적이었나요.
“고소를 결심하고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 망설였어요.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 직원이었고, 가해자는 차기 유력 대선주자였으니까요. 그런 대상을 향해 미투를 한다는 것은 한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정치적 지위와 그가 관계 맺은 수많은 권력자들에게 맞서는 일이에요. 힘겨울 거라 예상은 했어요. 하지만 이토록 길고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사실이나 사건에 관심을 갖고 또 도와줄 거라고 믿었어요. 그게 제가 가진 상식이었어요. 경험한 그대로 말하고 증거를 보이면 사법부도 정상적으로 판단해줄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죠. 저에 대한 거짓과 음해는 점차 커져만 갔어요. 매일 던져지는 수백 개의 칼날에 베이고 또 베였어요. 함께 했던 동료 중 일부는 위증과 2차 가해를 하기도 했죠.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너무나 큰 충격이자 고통이었어요.”
모순적이게도 안 전 지사가 성폭력 사건으로 직에서 물러나면서 별정직 공무원이었던 그 역시 일터를 떠나야 했다. 가해자가 임면권자인 탓에 성폭력 피해에 이어 노동권까지 침해당한 거다.
-일련의 광역단체장들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은 놀랍도록 비슷해요.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미투하거나 법적 대응을 하기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도요.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고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관이 지자체장이 아닌 피해자를 보호해준다는 안정감을 느껴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여전히 화형대 위의 마녀”
-논란이 일었던 사건이 또 있었어요. 공교롭게도 박원순 사건 직전이에요. 안 전 지사 모친상에 문재인 대통령과 지자체장, 장관, 청와대 인사, 여당 의원들이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하거나 공개 조문을 갔죠. 그걸 보면서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 같아요.
“공포스러운 한 주였어요. 심리적 압박을 느끼면서 온 몸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었죠. 호흡곤란이 와서 병원을 찾기도 했어요.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죠. 주변의 다른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출소가 견딜 수 없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만 해도 어떤 공포인지 잘 몰랐는데, 그걸 느낀 거예요. 가해자가 여전히 (사회ㆍ정치적으로) 건재함을 과시하던 날 (아동ㆍ청소년 성착취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도 석방됐죠. 그걸 보면서 ‘언젠가는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고 싶다는 꿈은 사치일까’ 싶었어요. 유죄 판결 뒤에도 변함없는 (가해자의) 위세와 권력의 카르텔 앞에서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새삼 다시 느꼈어요. 게다가 여전히 전 온라인에서 화형대 위에 사로잡힌 마녀였죠. 불은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어요. 언제쯤 이 고통이 끝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이 가해자가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이제 사건이 해결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몰라요. 김지은씨에게 이 사건은 종결됐나요.
“법적으로도 아직 진행 중이죠. 다소 힘겹지만 민사 소송과 2차 가해에 대한 고발을 계속 이어나가려 해요. 성폭력 피해자가 혼자만 고통 받고, 피해 당해야 하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나가고 싶어요. 피해자의 온전한 일상 회복까지가 진정한 싸움의 끝이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제발 그만…’ 야멸찬 N차 가해
-미투한 걸 후회해 본 적이 있나요.
“그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미투를 했어요. 하지만 미투 이후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변했어요. 지옥에서는 벗어났지만 2차 가해라는 또 다른 고통을 받으며 2년 가까이를 보냈어요. 하루하루 힘겨웠어요. 오랜 시간 재판을 통해 사실을 입증했음에도 편집된 일부 내용들을 가지고 저를 비난하는 분들로 인해 너무 힘들었어요. 게다가 제 가족들까지 비난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요. 이제는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야멸차게 계속되고 있어요. 인간이고 싶어 미투를 했지만, 정상적인 삶을 한순간도 영유할 수 없었어요.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답을 명쾌히 드릴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망설여져요. 누군가에게 미투 이후 마냥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럼에도 잘했다고 생각한 적은요.
“제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났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고통 속에 살아왔지만, 다시 그날로 되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말하기’는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요.”
(※기사 ③김지은 “숨을 곳 없다면 고통 마주하며, 산산이 깨진 일상 붙이고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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