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왓챠 '미세스 아메리카'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한국일보>
아빠는 1990년대 중반 MBC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을 즐겨보셨다. 아빠가 이 드라마들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나는 이 드라마들에서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나는 역사와 드라마 모두를 유달리 좋아하는 어린이였다. KBS ‘용의 눈물’로 조선 개국의 역사를 배웠고, ‘한명회’를 통해 조선의 정치를 배웠다. 대체로 배우 최수종이 왕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사극들을 조합하면, 얼추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를 드라마 순으로 정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공화국’ 시리즈가 보여주는 군인과 양복 입은 남자들의 세계에만은 도저히 이입되지 않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이유를 단순하게 내가 정치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왔다. 최근, 그리고 해외 작품까지 확장해서 보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이 ‘하우스 오브 카드’라든가 ‘웨스트 윙’, ’지정생존자’ 같은 작품에 열광할 때 나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늘 농담처럼 “난 양복 입은 남자들의 세계가 재미없다”고 말해왔지만, 왓챠의 ‘미세스 아메리카’를 보고 깨달았다. 조금도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들이 정치하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바로 그 양복입은 남자들의 세계 언저리에서 여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71년, 공화당의 한 정치인의 선거기금 모금 행사에서 정치인의 아내를 비롯해 공화당 지지자인 여성들은 비키니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선다.
그들의 남편은? 당연히 무대 아래에서 양복을 입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 무대 위에 있지만, 주인공이 아니라 구경거리인 여성, 그들 중 한 명은 일리노이주에 살고 있는 필리스 슐래플리(케이트 블란쳇)다. 필리스는 국방과 핵전쟁에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통찰력이 있고 관련한 책도 집필했지만 ‘아이를 여섯이나 키우는 가정주부’라고만 소개된다. 이미 두 번 선거에 출발했다가 낙선한 경력이 있는 그는, 다음 선거에 출마하는 대신,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건 바로 성평등 헌법수정안(이하 ERA)을 반대하는 일이다.
필리스의 맞은편에는 여성 해방 운동 진영의 사람들이 있다. 잡지 ‘미즈(Ms.)’의 편집장이며 동 세대 페미니스트 아이콘이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로즈 번), 책 ‘여성성의 신화’로 수많은 여성의 인생을 바꿔놓은 베티 프리단, 하원 의원으로 주류 정치계 안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벨라 앱저그(마고 마틴데일), 그리고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경선 후보로 최초로 출마한 흑인 여성 셜리 치점(우조 압두바)은 ERA의 비준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드라마는 이 두 진영 사이의 10년간의 싸움을 인물 중심으로 조명하며 따라간다.
특히 추천하고 싶은 에피소드는 셜리의 이야기를 담은 3회와 벨라의 이야기인 7회다. 당선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셜리는 흑인으로서의 자신과 여성으로서의 자신 중 무엇을 더 우선순위에 두고 대변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받고, 동시에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를 강요받는다.
벨라는 하원 의원으로 현실 주류 정치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비준을 실현하기 위해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낙태와 관련된 법안이나 성소수자 차별 금지와 같은 누군가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를 타협의 카드로 내밀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 두 사람이 동일한 사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그리고 자신 앞의 문제나 실수에서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반성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지, 이 과정이 내게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로 보였다.
이런 인물들을 통해 이 드라마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복잡함이다. 이들은 때로 모순된 주장과 행동을 하고 윤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다. 모든 인물에게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구석이 있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당연하다. 실제의 그들이 그랬고, 모든 인간이 그렇기 때문이다. 찬반의 구도로 보면 페미니스트들과 필리스로 양분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양 끝에 서 있지 않다. 이들의 싸움은 뚜렷하게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로 나뉘어 진행되지 않는다.
ERA 찬성 측에는 공화당원 질 럭겔스하우스(엘리자베스 뱅크스)를 비롯해 미국에서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도 상당수 존재한다. 필리스의 곁에서 함께하는 STOP ERA에는 인종차별주의자, 극우 기독교 낙태 반대론자부터 미국적 가족주의를 중시하는 가정주부까지, ERA 찬성 쪽보다는 좁더라도 분명히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들이 속해있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이 개별 인물들을 비추면서 연대가 싸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필리스는 비준을 막고자 하는 세력의 중심에 서서 같은 메시지를 동시에 내며 몰아붙이는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그럴 수 없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인종과 계급, 성정체성을 갖고 있고 처한 상황도, 위치도, 싸움의 이유도 다르다. 그 차이를 대충 뒤섞을 수도 없고,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이들은 개별의 사건에서도 갈등하고 대립할 뿐 아니라, 친구이며 동지로서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전부 다 안고 가면 어때?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떠드는 게 무슨 혁명이야”라는 글로리아의 말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떠들고 다른 뜻을 묵살하는 것은 혁명도 아니고, 페미니즘도 아니라는 것. 이 작품의 메시지는 거기까지 간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1977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열린 전미여성대회 후에도 ERA가 비준되지 않고, 벨라 앱저그가 앞선 행사를 연 전국여성정치회의의 회장직에서도 물러나게 되면서 여성 해방 운동 진영이 와해되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싸움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의 40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서 1970년대는 과거가 된다.
그렇다면 필리스가 승리한 것일까? 일찌감치 레이건을 지지하며 다시 한번 워싱턴 입성을 바랐던 그의 꿈은 레이건의 전화 한 통으로 좌절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 긴 싸움에서 그 어떤 여성도 승리하지 않았다. 현실의 필리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운동을 계속해나가다가 말년에 공식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이 지지 선언은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인정할 정도로 그의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어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어떤 역사는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고, 이어진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기존에는 그 어떤 공간보다 정치의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부엌이라는 공간에서부터 개인의 이름에 새겨진 정치적인 의미까지 끌어냄으로써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화면으로 옮긴다.
무엇보다 뛰어난 여성 배우들이 캐릭터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을 연기하며 화면 속 시간과 공간 모두를 장악하는 걸 보는 건 드물기에 더욱 특별한 경험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위치에 서서 여성 인권의 후퇴에 기여한 문제적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도 복잡함을 표현해낸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이 작품을 얼마나 더 좋게 만들었는가에 관해서는 짧게나마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복잡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조명하며, 이들의 선택과 현실의 정치를 엮고, 작품 바깥에서는 크레딧의 대부분을 여성의 이름으로 채운 작품. 양복 입은 남자들 없이도 ‘미세스 아메리카’가 훌륭한 정치 드라마인 이유다.
이 드라마를 보며 한국의 페미니즘 정치사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지를 상상해보았다. 호주제에 맞서 싸운 여성들로부터 시작해 한국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고 또 탄핵되기까지의 과정에서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시 불붙은 페미니즘 운동과 그 안과 밖의 치열한 싸움과 목소리들을 엮어 한국 현대사를 여성들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드라마가 있다면 어떨까.
이 이야기 속에서도 양복 입은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 결정으로, 전화선 너머의 목소리로, 모니터 뒤의 몇 마디로 여성들을 좌절시키고 분열시킬 것이다. 그뿐인가. 스스로 안티 페미니스트임을 자임하며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틀렸다’고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은 한국의 필리스 자리에 서 있다. 이야기는 충분히 준비된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드라마일 수 없음을 다시금 생각할 때, 이 싸움을 지속하는 일에도 우리의 이야기가 기록되기 위해서도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필수적이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이 급진적이라고 말하는 주장의 어떤 부분은 이미 낡았고, 어떤 부분은 실현조차 되지 않은 혼돈의 2020년, 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치열하게 싸우고 그럼에도 연대하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를 치열하게 기록하고 한국 여성의 정치를 다시 쓴 이야기를 보게 될 날도 올 것이다. 부디 이 이야기는 '미세스 아메리카'와는 달리 여성의 이름으로 끝나는 승리의 드라마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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