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69세 여성이 29세 남성에게 성폭행당했다? 저도 믿기지 않았죠"

알림

"69세 여성이 29세 남성에게 성폭행당했다? 저도 믿기지 않았죠"

입력
2020.08.30 09:00
수정
2020.08.31 00:03
21면
0 0

영화 '69세' 주인공 예수정 인터뷰

배우 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배우 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69세 여성이 20대 남성에게 성폭행당한다는 설정이라니, 설마 이런 일이 있을까 믿어지지 않았어요.”

중견 배우 예수정(65)은 영화 ‘69세’ 출연 요청을 받고서 시나리오를 쓴 임선애 감독에게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냐고 물었다. 실제 해외에서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비단 해외에서만 있을 법한 희귀한 사건은 아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국내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보도된 바 있다.

그가 출연을 결정한 건 단지 소재 때문이 아니었다. 취약한 피해자에 대해 99%의 사람들이 편견을 드러낼 때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에 더 관심이 생겼다. 최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예수정은 “끔찍한 일을 당한 주인공이 자신이 직면한 문제 앞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개봉한 ‘69세’는 69세 여성 효정(예수정)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29세의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의 이야기를 그린다. 효정은 깊은 고민 끝에 동거 중인 동인(기주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간호조무사는 합의 하에 일어난 일이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공권력은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간호조무사의) 친절이 과했네”라며 효정에게 모욕을 주고, 법원도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극중 효정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 조용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낸다. 영화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극적인 대립이나 피해자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그리는 대신 효정이 일상의 삶을 버텨내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큰 소리 한 번 내지르지 않고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도 피해자가 겪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예수정의 뛰어난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69세의 나이는 파도가 몰아쳐도 자기 모습을 유지하는 바다와도 같지 않을까 생각하며 연기했다"면서도 "마음껏 표현할 수 없어 답답했다"며 크게 웃었다.


영화 '69세' 중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 중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이 영화는 노년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면으로 맞서는 작품이다. “69세의 여성에게도 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성이 없는 존재로 여기죠. 옷도 최대한 신체를 가리는 것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여성성을 숨겨야 하는 거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겪은 피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래도 효정은 용기를 내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패배가 확실한 전투에 나가 있는 군인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그에겐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친구 동인이 있습니다. 그런 연대감이 한발짝 내딛도록 도와주는 거죠.”

그는 이 영화가 노년 여성을 현실적으러 그린 점이 좋았다고 했다.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는 연속극 속 할머니처럼 지나치게 전형적이거나, 개별성이 지워진 특정 집단으로서만 부각됐다. 그는 “효정이 특수한 사건을 겪긴 했지만 자기 삶을 책임지기 위해 일을 하러 나가는 등 지극히 일반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걸 보여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69세’는 개봉과 함께 코로나19 재확산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뿐 아니다. 한국전쟁 직전을 배경으로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 ‘화전가’에도 출연 중이었는데, 매진사례를 기록하던 이 작품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조기 종연했다. 그는 “무례한 이들을 가차 없이 잡아들이는 역할을 맡으면 망설임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예수정은 유독 사회성 짙은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 ‘하나코’와 영화 ‘허스토리’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혈압이 오르고 화가 나는 일이 많다 보니 평소 ‘내 앞의 머리카락이나 잘 줍자’는 식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산다”며 “그래서 작품에서나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관객이 뭔가 발견할 수 있는 작품, 사회적 편견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수 있는 작품이 좋다”고 말했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최불암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던 고 정애란의 딸인 예수정은 대학 시절 이후 40년 넘게 연극 무대를 지킨 베테랑 연기자다. 연극에만 집중하다 21세기 들어 드라마와 영화로 무대를 넓혔다. ‘도둑들’ ‘부산행’ ‘신과 함께’ 등 1,000만 영화에만 네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 '69세'에 출연한 배우 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에 출연한 배우 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남자로 태어났다면 축구선수를 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는 그에게 배우는 여전히 "최고의 직업”이다. 그는 “연기를 하다 보면 각양각색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며 "연기는 인생을 배우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