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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CEO, 제주 '나눔할망' 아십니까

입력
2020.09.15 04:30
수정
2020.09.16 09: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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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제주 김만덕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제주의 대표 위인 김만덕의 삶을 조명한 창작 뮤지컬 '만덕' 공연 모습. 제주시 제공.

제주의 대표 위인 김만덕의 삶을 조명한 창작 뮤지컬 '만덕' 공연 모습. 제주시 제공.


이 기행은 ‘한국근현대사기행’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는 언제부터이며, 이 기행에 언제부터를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언제부터가 근대인가하는 시대구분은 논쟁이 되고 있지만 대개 근대의 시작을 한말의 대격변기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기행은 그 이전을 몇 개 포함하기로 했다. ‘근대’의 핵심은 ‘자유와 평등’에 있다고 보고, 전근대 시대라고 하더라도 자유·평등을 지향한 운동이나 인물은 포함하기로 했다. ‘근대적 전근대’라고나 할까?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민중봉기인 12세기의 명학소 민중봉기(‘망이, 망소이의 난’), 시대의 규범을 넘어서려했던 16세기의 허난설헌과 허균,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살았던 제주의 여성사업가 김만덕과 실학의 대표주자 정약용의 흔적도 찾아가기로 했다.


제주 여성상인 '김만덕' 표준영정.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주 여성상인 '김만덕' 표준영정.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부장주의가 유교와 얼마나 관련이 있느냐는 논쟁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강한 가부장사회이다. 조선초기까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고 조선중후기에 들어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 일곱 살이 되면 남자와 여자가 같이 앉으면 안 된다는 ‘남녀칠세부동석’으로부터 ‘출가외인’ 등 가부장제는 사방에 깔려있다.

여자들은 기초소양이외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주로 해야 하는 일을 제사와 손님접대라고 생각했고, 과거 등을 보거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정절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도록 강조해 재혼을 막았고, 재산상속에도 차별했다. 유럽에서 일부 국가들이 법으로 금지시켜 종교탄압의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슬람의 부르카처럼, 우리도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전통적인 성리학을 비판했던 실학자 이익까지도 “부인은 근면, 검소, 남녀유별만 알면 된다,” “부인은 아침, 저녁으로 가족을 공양하고 제사와 손님 받들기도 바쁜데 무슨 책을 읽느냐?”는 가부장주의를 보여줬다. 가부장제의 극치는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법도라는 ‘삼종지도(三從之道)’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니. 여자는 평생 ‘종’으로 살라는 이야기였다.


제주도의 '광화문광장'인 관덕정. 흉년이 들면 김만덕은 여기에 솥을 걸고 죽을 쒀 굶주린 도민들에게 나눠져 그들을 살렸다. 손호철 교수 제공

제주도의 '광화문광장'인 관덕정. 흉년이 들면 김만덕은 여기에 솥을 걸고 죽을 쒀 굶주린 도민들에게 나눠져 그들을 살렸다. 손호철 교수 제공


이런 극단적인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당당하게 자기사업을 해서 성공한 여성기업인이자, 단순히 돈만 번 것이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판 빌 게이츠’(그는 많은 자선사업에 천문학적 기부를 하고 있다)가 바로 제주의 김만덕이다. 그의 삶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져 있다.

“초리초리 줄 섭서(차례 차례 줄 서세요)"

100여 년 전 이재수와 제주민들이 점령했던 제주관아 정문 옆에는 큰 정자가 하나 있다. 제주민들이 자주 모였던 ‘제주 사랑터’ 관덕정이다. 220년 전인 1794년 가을, 제주의 찬바람을 맞으며 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긴 줄은 선 민초들을 포졸들이 진 땀을 빼며 정리하고 있었다.

연이은 흉년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굻어죽었다. '정조실록'에는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고 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조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쌀 5,000석을 실어 급파한 배의 절반이 풍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에 제주의 거상 김만덕이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사들여 친척에게 50석을 나눠주고 나머지 450석으로 관덕정에 솥을 걸고 죽을 써서 제주도민 3분의 2에게 나눠 줬다고 한다.


조선시대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던 선창이 있었던 건입동에 재현해 놓은 김만덕 객주. 손호철 교수 제공

조선시대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던 선창이 있었던 건입동에 재현해 놓은 김만덕 객주. 손호철 교수 제공


제주공항에서 제주항 쪽으로 가다보면 조선시대 육지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관문이었던 건입동이 나온다. 이곳은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물품을 위탁하여 판매해주고 상인들을 재워주던 객주가 많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 김만덕의 객주였다. 김만덕은 18세기 초(1739년) 양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자 은퇴한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수업을 받아 제주관아의 관기가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생이 된 그는 성인이 된 뒤 관아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호소하여 양인의 신분으로 돌아왔고 중간상인에 해당되는 객주가 되었다. 특히 그는 제주양반집에 육지의 옷감과 화장품, 장신구 등을 팔고 제주특산물인 전복, 미역, 말총들을 육지에 파는 등 교역에 남 다른 수완을 발휘해 여자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제주에서 손꼽히는 큰 부자가 됐다. 재건해 놓은 객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기념관에는 이에 대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그의 선행을 듣고 감동한 정조는 제주목사를 통해 그에게 소원을 물었고 이에 김만덕은 “서울에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보고 싶고 금강산에 가서 일만 이천 봉을 보면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정조는 제주 여자는 육지에 가지 못하는 당시의 법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러 직접 만나 명예관직 의녀반수직을 수여했고 금강산 구경도 허락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죽을 때도 양아들의 기본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재산을 제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했다.


제주시 모충사에 있눈 김만덕의 묘. 손호철 교수 제공

제주시 모충사에 있눈 김만덕의 묘. 손호철 교수 제공


김만덕기념관에서 조금만 가면 모충사라는 사당이 있다. 이 절에는 제주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덤이 하나 있다. 김만덕의 묘이다. 제주사람들은 만덕이 죽은 뒤 그를 ‘나눔할망’이라고 부르며 어린아이들에게 “김만덕 나눔할망처럼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고 한다.

나눔할망답게 김만덕의 묘는 초라하지만 어느 것보다 빛났다. 그의 선행을 듣고 추사 김정희가 써준 '은광연세(恩光衍世ㆍ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는 기념석 때문이다. 조금 더 가면, 최근에 만든 기념탑이 있다. 한라문화제 때 매년 이곳에서 그를 기리는 만덕제를 연다. 제주시는 40여 년째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여성에게 김만덕상을 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켁레이의 초상

엘리자베스 켁레이의 초상


역사적으로 여성CEO는 서양에서도 흔치 않다. 여성CEO는 17~18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들 초기 여성기업가들은 부자 아버지나 부자 남편으로부터 사업을 물려받거나, 여자기업인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었던 네덜란드에서 사업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는 경우는 소수이지만 아프리카계 노예출신으로 재봉기술 등 자신의 손재주나 아프리카계 여성용 화장품 제조 등으로 미국에서 성공했다.

김만덕은 소수 아프리카계 노예출신처럼 자수성가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털어 주변들을 돌보는 나눔의 철학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엘리자베스 홉스 켁레이(Elizabeth Hobbs Keckleyㆍ1818-1907) 등의 극소수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켁레이는 재봉기술로 워싱턴 최고의 양장점을 차려 링컨대통령 부인 등 고위층 여성들의 옷을 만들어주고 번 돈으로 아프리카 노예출신들과 남북전쟁 부상군인들을 위한 구호기관을 만든 여자이다. 하지만 김만덕은 이들보다 근 100년 앞서 있다.


김만덕의 선행으로 은혜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추사의 글을 새긴 기념석. 김만덕 묘 옆에 세워져 있다. 손호철 교수 제공

김만덕의 선행으로 은혜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추사의 글을 새긴 기념석. 김만덕 묘 옆에 세워져 있다. 손호철 교수 제공


국내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인 경주 최부자집, 구례 우조루 등이 대대로 물려받은 농지에 기초한 ‘세습 지주’ 집안이었다면, 김만덕은 스스로, 그것도 여성차별이 극심했던 조선후기에, 장사로 부를 만든 ‘상업자본’이었다는 점에서 몇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김만덕은 양반 명문집안에서 태어난, 이 땅의 초기 페미니스트였던 허난설헌과도 또 다르다.

주목할 것은 서양의 초기 자수성가 여자기업인들이 대부분 아프리카계출신이고 김만덕 역시 변방이었던 제주의 민초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역시 변혁은 ‘변방’에서 출발하는 것인가 보다. 특히 김만덕은 조선이라는 ‘세계의 변방’의, ‘지역적 변방’인 제주의, ‘젠더적 변방’인 여성인데다가, ‘계급적 변방’인 가난한 집안의 고아라는, ‘변방의 변방의 변방의 변방’이라는 ‘4중의 변방’, ‘4중의 핸디캡’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성공한 것이다.


가뭄에 쌀을 풀어 제주도민을 살린 김만덕의 선행을 묘사한 모충사 추모탑의 부조. 손호철 교수 제공

가뭄에 쌀을 풀어 제주도민을 살린 김만덕의 선행을 묘사한 모충사 추모탑의 부조. 손호철 교수 제공


그의 나눔정신은 특히 사회적 양극화의 신자유주의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고 있으며 내로라하는 ‘진보인사’들까지도 ‘탐욕’에 빠져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본받아야 하는 모델, 우리의 ‘오래된 미래’이다. 물론 나눔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근본적인 대안인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들지만, 뚜렷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중요한 ‘완화책’인 것은 사실이다.

김만덕 기념탑을 올려다보고 있자, 한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다가왔다. 김만덕이 활동하던 시절에 “영국에서는 자본주의가 태동했다. 만덕은 그 시절에 이미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문제를 극복할 대안까지 몸소 실천했다. 그를 위기에 처한 인류문명을 구할 새로운 문명의 상징으로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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