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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초' 행보 이어간 긴즈버그... 트럼프와는 대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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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초' 행보 이어간 긴즈버그... 트럼프와는 대립각

입력
2020.09.19 11:22
수정
2020.09.21 11: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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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추모하는 꽃과 촛불이 이날 미국 워싱턴 대법원 앞에 놓여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18일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추모하는 꽃과 촛불이 이날 미국 워싱턴 대법원 앞에 놓여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대법관은 27년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진보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할 정도였다. 미국 사법 역사상 ‘여성 최초’ 행보를 이어 가며 사법부의 유리 천장 혁파에도 상징적 역할을 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코넬대를 졸업하고 1956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여성 차별이 남아 있던 당시에 육아를 병행하는 이중고 속에서도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뉴욕에서 로펌에 취직한 남편을 따라 명문 컬럼비아 로스쿨로 옮겼으며 탁월한 성적으로 수석 졸업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재직했고, 1973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자유인권협회에서 법무 자문위원을, 이와 거의 동 시기인 1972년부터 1980년까지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로스쿨 교수로 재직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였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재직 기간인 1980년 6월엔 미국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1993년 6월에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지명됐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명에 의해서였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성 평등과 여성 권익 증진을 위한 변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의 여성 인권운동 프로젝트에서 수석 변호사를 맡아 각종 소송을 주도하기도 했다. 성적 불평등에 관한 판례를 잇따라 변경하면서 여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법관 임용 후에는 동성결혼 합법화,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여성 입학 불허에 대한 위헌 결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등의 판결을 내리면서 소수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2015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0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에 포함됐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긴즈버그 대법관이 여러 차례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대법원 공개 변론 일정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긴즈버그 대법관의 책임감을 높게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대립각을 세워 왔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2016년 대선 당시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과 법원이 어떤 곳이 될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는 정신이 나갔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자신이 숨진 후 미국 사법지형이 보수화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은퇴하면 총 9명의 대법관 중 진보 4명, 보수 5명 구도인 대법원이 더욱 우경화한다며 종신 대법관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욕도 계속해 피력해 왔다. 미국 공영 NPR 방송은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을 며칠 앞두고 손녀에게 “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김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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