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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울 건 배우자"는 옛말…日 향한 한국의 시선, 어떻게 변했나?

입력
2020.10.14 04:30
수정
2020.10.14 17:58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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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변한 것은 한국 사회다

과거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의 관점은 ‘미워도 배워야 한다’라는 단조롭고 힘겨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빡빡하고 부담스러운 정서 대신 동등한 눈 높이에서 일본을 직시하려는 여유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과거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의 관점은 ‘미워도 배워야 한다’라는 단조롭고 힘겨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빡빡하고 부담스러운 정서 대신 동등한 눈 높이에서 일본을 직시하려는 여유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제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그늘 탓에, 혹은 외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경쟁 의식이 솟기 쉬운 이웃 나라다보니, 한국이 일본을 보는 눈에는 곱지 않은 정서가 깃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랬던 인식이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을 부쩍 느낀다. 한국 사회가 일본 사회를 보는 눈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일본이 미워도 배울 건 배우자’

일본에서는 1960년대를 ‘고도 성장의 시대’라고 부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처참한 패배에서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에 일본 경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한반도에서 터진 6.25전쟁으로 인한 특수, 도쿄올림픽을 의식한 경기 부양 정책 등 여러 가지 배경이 있지만, 굴지의 미국 기업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일본 제조업체의 저력도 평가절하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자동차나 가전 등 첨단 기술력을 무기로 하는 일본 제품이 경쟁력을 인정받으며 세계에서도 주목 받는 무역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일본이 전쟁 폐허에서 보란 듯이 재기해 수십년 만에 경제 선진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1980년대에는 서구의 유수 기업들이 앞다투어 일본 기업을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 기업이 유연한 노동 시장, 분업을 통한 업무 합리화를 중시했던 반면, 일본 기업은 종신고용제를 유지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등 정반대의 경영 방식을 고수했다.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적 불황 속에서도 이 독특한 경영 방식이 홀로 저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문화적으로 낯선 이 섬나라의 승승장구가 서구인의 눈에는 어지간히도 불가사의했던 듯, ‘일본인은 경제적 동물’이라는 조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웃 나라의 성공 신화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6.25전쟁의 아픔을 떨치고 일어나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던 한국에게 불과 수십년 사이에 패전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변모한 일본의 사례는 좋은 자극이었다. 이질적인 서구식 자본주의보다 문화적으로 유사한 일본의 성공 사례를 본보기로 삼기도 좋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1965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의 상처에서 비롯된 정서적 반감은 여전했지만, 이 시기에 “일본이 미워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잡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1990년대 한국의 대중 문화계에서는 일본의 최신 트렌드를 남몰래 모방하는 것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방송계는 일본 TV프로그램을 슬쩍 베끼고, 의류업계는 도쿄의 패션 1번지 시부야에서 은밀하게 동향을 조사했다. 일본 대중 가요를 노골적으로 표절한 노래가 한국 차트 순위에 오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에는 일본의 대중 문화 상품이 불법이었고 해외 여행의 기회도 흔치 않았던 만큼, 사람들은 일본의 것을 베꼈다는 사실조차 알 길이 없었다. 문화 상품의 수입을 금지한 상황이 역설적으로 ‘베끼기’ 관행을 부추기는 조건이 된 것이었다. 문화적 사대주의에 물든 관행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일본의 대중 문화 산업이 경제적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은 ‘K팝’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 때는 ‘제이팝(J-Pop)’이 ‘핫’했다. 선정적,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일본의 음악, 방송 프로그램, 만화, 애니메이션 등이 세련된 오락성과 폭넓은 다양성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폭넓게 사랑받았다.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본 만화책이나 패션 잡지의 해적판이 큰 인기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은 훨씬 이전에도 일본의 문화 상품은 성공의 조짐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는 일본의 대하 소설이 번역, 출간되어 인기를 끌었다. 역사 소설에 등장한 일본사의 풍운아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ㆍ‘덕천가강’ 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장수)가 난데없이 큰 화제가 되었고, 여성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신파 소설 <오싱>이 베스트셀러였다. 일본의 ‘저급한’ 소비 문화가 젊은이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우려가 제기되곤 했지만, 사실은 일본 문화에 먼저 호감을 보인 것은 젊은이가 아니라 중장년층이었다. 일본 대중 문화가 전면적으로 개방(1998년) 되기 전, 일본 문화는 한국의 대중 문화계가 책상 서랍 속에 숨겨 놓고 들추어 보는 ‘참고서’ 같은 존재였다.

◇일본관의 변화, 사실 변한 것은 한국 사회다

이런 분위기가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의 최첨단 기술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존재감은 흐려진 반면 한국 기업은 맹렬한 기세로 선전 중이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해외 유명 인기 차트 수위에 오르는 등 ‘K팝’이 세계적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기업 경영이나 문화 산업의 패러다임도 크게 변했다. 굳이 옛날 일본식 경영을 본받을 일도, 일본의 방송 프로그램이나 음악을 은근슬쩍 따라할 필요도 사라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나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일본 정부 대처가 허술하니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나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세대다. 젊은 세대에게 일본은 ‘오타쿠 취미를 만끽할 수 있는 곳’ 혹은 ‘맛있는 스시를 먹을 수 있는 여행지’일 뿐, 과거에 그 나라를 본보기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와 닿지도 않는다. 한국 사회가 일본 사회를 보는 눈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기업이나 일본 대중 문화가 광채를 잃고 있는 만큼 예전에 비해 활기가 사라지고 있는 일본의 사회상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결과일 터이다. 하지만 사실 ‘일본을 본받자’고 하던 과거에도 일본 사회는 수많은 모순과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 사회가 떠안은 과제가 버겁다 보니 그런 점이 잘 안 보였다. 반면, 지금의 일본 사회도 장점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몸집이 부쩍 커진 지금의 한국 사회에 그런 점이 잘 안 보인다. 역시 한국에서의 일본 담론이 일본 사회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가 일본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의 한국 사회는 ‘미워도 배워야 한다’라는 단조롭고 힘겨운 관점에서 일본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런 빡빡하고 부담스러운 정서가 옅어진 만큼, 비로소 동등한 눈높이에서 일본 사회를 직시하고 서로의 얽힌 문제를 성숙하게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이 칼럼이 우리 사회가 이제는 담담한 심정으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는, 그런 시도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이쯤 되면 일본 사회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혹은 보고 싶어 하는지도 궁금해지지 않는가? 실제로 일본의 한국관도 꾸준히 변해 왔는데, 특히 21세기 들어서면서 한국을 보는 일본인의 관점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겠으나, 그보다는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의 상대적 자의식이 여실히 드러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주 뒤에 게재되는 이 칼럼의 다음 편에서는 일본 사회가 한국을 보는 눈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김경화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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