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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에서 밥 먹고, 박스 한 장에 의지.... 노숙인 겨울나기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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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에서 밥 먹고, 박스 한 장에 의지.... 노숙인 겨울나기 비상

입력
2021.01.10 16:04
수정
2021.01.10 21:1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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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북극 한파 견디는 서울 도심 노숙인들
지원센터·무료급식소도 코로나로 제한 운영

10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 지하보도에서 한 노숙인이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박스와 신문 등으로 잠자리를 만든 뒤 라면으로 저녁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10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 지하보도에서 한 노숙인이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박스와 신문 등으로 잠자리를 만든 뒤 라면으로 저녁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노숙 생활 8년차예요. 천주교, 불교, 기독교에서 같은 날 동시에 도와주러 온 건 어제가 처음이야. 그만큼 추운가 봐요, 올해가."

10일 오전 1시 서울 중구 남대문 근처의 한 지하보도. 노숙 생활 8년차를 맞은 정모(49)씨는 남아있던 소주 반 병을 마저 비운 뒤에야 종이 상자로 만든 자신만의 '성채'로 기어 들어갔다. 전날 받은 내복을 껴입고 양말 두 켤레를 겹쳐 신는 등 중무장을 한 채 이불을 덮었다. 마지막 남은 핫팩 하나를 터트려 이불 사이에 넣었지만 지하 공간까지 밀고 들어온 한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노숙인들에게 더 가혹한 북극 한파

영하 20도를 넘나든 북극발 한파가 전국을 강타하면서 길바닥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노숙인들이 생존 위기를 맞았다. 특히 이번 겨울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과거보다 지원까지 줄어들면서, 노숙인들은 유독 추운 겨울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10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서울역, 남대문, 명동 일대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은 400~600명으로 추정된다. 최저온도가 영하 16도까지 떨어진 9일 늦은 저녁 한국일보가 노숙인 밀집 지역을 찾았을 때, 이들은 또 하루를 버티기 위한 취침 준비에 한창이었다. 일부 노숙인들은 주변 상점에서 모아온 박스에, 돗자리나 신문지로 온몸을 두르며 한기와 맞섰다. 한켠에서는 "술이라도 마셔야 좀 따뜻해진다"면서 서너 명의 노숙인들이 안주 없이 강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일대에서 노숙 중인 노숙인의 잠자리. 이승엽 기자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일대에서 노숙 중인 노숙인의 잠자리. 이승엽 기자

노숙 3개월차 60대 여성은 "첫 겨울인데, 이렇게 추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노숙 중이라는 70대 노인은 "수없이 많은 겨울을 보냈는데 좀체 추위엔 익숙해지질 않는다"면서 "예전에는 삼한사온이라는 말이 통했는데, 올해는 일주일 내내 추워 아침마다 몸이 쑤신다"고 얼굴을 찌푸렸다.

서울역도 강추위에 노숙인 내쫓지 못해

지하보도 내부에 유리문이 있어 바람이 덜 들어오는 남대문과 중앙우체국 일대 지하보도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러나 서울역 지하보도엔 바람을 막아주는 차폐막이 없는 곳이 많아 이 곳의 노숙인들은 매서운 삭풍에 무자비하게 노출돼 있다. 오른쪽 다리를 저는 노숙인 김모(55)씨는 "나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은 (멀리 갈 수 없어) 봉사자들이 많이 오는 역 근처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추위에 순찰을 도는 전철역 직원들도 이번만큼은 노숙인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했다. 서울역 관계자는 "평소에는 역 내부에서 노숙인들을 내보내지만, 최근 며칠은 무작정 노숙인들을 내쫓고 있지는 않다"고 전했다.

10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지하보도에서 노숙인이 잠을 자고 있다. 이승엽 기자

10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지하보도에서 노숙인이 잠을 자고 있다. 이승엽 기자


1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입구 앞에서 노숙인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이승엽 기자

1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입구 앞에서 노숙인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이승엽 기자

코로나19에 한파까지 겹치며 노숙인들이 몸을 녹일 곳도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노숙인 자립을 돕는 서울시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경우 응급 잠자리가 257개로 예년에 비해 부족하지는 않다. 다만 주간 시간대 휴게실 역할을 하는 산하의 서울역 희망지원센터는 코로나19로 예년 50~60명이던 수용인원을 15명으로 줄여 여기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10일 오전 7시, 센터가 문을 열기 한 시간 전부터 센터 앞에 노숙인 10여명이 길게 줄을 섰다. 한 50대 남성은 "부지런히 줄 안 서면 못 들어간다"면서 "또 들어갔다고 해도 한 번 센터 밖으로 나오면 다음 사람이 입장하는 방식이라 중간에 잠깐 나올 수도 없다"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파 이후 응급 잠자리를 이용하는 노숙인이 늘었다"며 "직원들이 주말에도 총출동해 나와 동사 위험이 있는 노숙인들은 없는지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끼니를 해결하는 무료급식소도 사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3차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격상되면서 전국 대부분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았다. 소수 급식소가 실내 배식 대신 도시락 배부 형태로 바꿔 그나마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노숙인들은 거리에 내몰린 채 맨바닥에서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처지다.

경기 성남시에서 30년째 무료급식소를 운영 중인 김하종 안나의집 신부는 "거리두기 격상 이후 안나의집을 찾는 노숙인이 하루 평균 650명에서 800명으로 늘었다"면서 "코로나만 아니었으만 따뜻한 실내에 이들을 모실텐데,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8일 오후 경기 성남 안나의집에서 한 노숙인이 무료로 받은 도시락을 먹고 있다. 김하종 신부 제공

8일 오후 경기 성남 안나의집에서 한 노숙인이 무료로 받은 도시락을 먹고 있다. 김하종 신부 제공


8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주변 공원에서 한 노숙인이 도시락을 먹고 있다. 김하종 신부 제공

8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주변 공원에서 한 노숙인이 도시락을 먹고 있다. 김하종 신부 제공


이승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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