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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불복종의 일상화

입력
2021.01.11 18:12
수정
2021.01.11 21: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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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 시위대 한 명이 6일(현지시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사무실까지 들어와 의자에 앉아 발을 책상 위에 올리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 시위대 한 명이 6일(현지시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사무실까지 들어와 의자에 앉아 발을 책상 위에 올리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외신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집무실에 난입한 시위대 중 한 명이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웃는 모습이다. 널브러진 성조기 옆 그의 허리춤엔 몽둥이 하나도 꽂혀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불복 운동’으로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미 의회 유린의 한 장면이다.

미국 시민들의 불복 역사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에세이(시민 불복종)를 통해 종종 설명된다. 소로는 멕시코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노예제도를 받아들인 정부에 저항해 세금을 내지 않았다.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이후 그 글을 썼다. 반세기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그 글은 1900년대 초 인도 간디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의 무저항 운동을 통해 세계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이 됐다. 그의 에세이는 보편적 가치가, 또는 법보다 고귀하다고 믿는 ‘양심의 법’이 유린당했다고 생각할 때 시민들은 불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로의 글을 소환한 건 트럼프 지지자들의 불복종과 함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불만과 분노가 누적돼 폭발한, ‘분노의 화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연장에 반발해 ‘불법’으로 문을 연 헬스장 주인들이 떠오른다.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초유의 방역지침 불복에 나선 이들이다. 과태료까지 감수한 이들의 불복종의 결기가 통했던지, 헬스장 영업시간과 인원에 제한을 두는 방식으로 거리두기 규제가 일부 완화됐다.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 사태도 마찬가지. 그의 출소를 지켜본 많은 이들이 정의를 위해 사적 제재(린치)를 불사하겠다고 소리치고 있다.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법 따위는 지킬 수 없다고도 한다. 죄질에 비해 가벼운, 징역 12년형을 마치고 그가 세상으로 나왔을 때 많은 시민은 조두순이 탄 차에 발길질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차 지붕에 올라갔다. 조두순이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신청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내가 낸 세금으로 조두순의 생계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는 청와대 국민 청원이 등장했다. 일종의 불복종 시위다.

출소한 조두순이 탑승한 차량을 향해 한 시민이 발길질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출소한 조두순이 탑승한 차량을 향해 한 시민이 발길질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6개월 영아 정인이를 학대해 죽음으로 몬 양부모 관련 기사에 붙은 댓글은 어떤가. 분노와 비난이 빗발친다. 양부모가 함께 찍은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채 각종 커뮤니티에 돌아다니고, 이들의 직장까지 낱낱이 공개됐다. 정인이 양모를 그렇게 키운 친정 부모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할 정도다. 이 분노 역시 검찰과 경찰이 내놓은 수사 결과에 대한 일종의 불복종이다.

일견 과해 보이는 성난 시민들의 행동이지만 정색하고 나서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빈약했던 수사와 처분 등 그들 가슴에 분노가 쌓인 과정을 되돌아보면 쉽지 않을 것이다. ‘제도와 시스템’이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생긴 간극을 채운 것은 분노였다.

분노와 거기서 비롯된 불복종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그만큼 천문학적 사회적 비용을 동반한다. 비록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해 크게 한번 망가진 미국이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그 어느 나라보다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반목과 질시, 대립이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국민에게 불필요한 분노를 ‘강요’하는 행정은 이 정도면 족하다. 갈 길이 멀다.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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