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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여성 노동자들은 왜 시리아에 갇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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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여성 노동자들은 왜 시리아에 갇혀 있을까

입력
2021.01.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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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매매로 시리아에 팔린 필리핀 여성들
구타, 성폭력, 임금 체불 등 온갖 학대 신음
필리핀 정부도 고통 외면, 귀국 기약 못해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한 여성이 집 역할을 하는 세발자전거 안에서 무료 배포하는 식량을 받기 위해 줄 서있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필리핀은 코로나19 여파로 경제가 마비되고 실업자가 속출해 많은 이들이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마닐라=AFP 연합뉴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한 여성이 집 역할을 하는 세발자전거 안에서 무료 배포하는 식량을 받기 위해 줄 서있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필리핀은 코로나19 여파로 경제가 마비되고 실업자가 속출해 많은 이들이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마닐라=AFP 연합뉴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여성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거처를 옮겨도 열악한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국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시리아에 갇혀 온갖 학대에 시달리고 있는 필리핀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24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인신매매를 통해 시리아로 흘러 들어간 필리핀 여성들의 삶을 추적했다. 이들은 원래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일하는 줄 알고 지원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고용 대행사는 여성들을 감금하고 일인당 8,000달러에서 1만달러를 받고 시리아에 팔아 넘겼다.

10년 넘게 내전에 시달려 전 국토가 폐허가 된 시리아가 이들이 종착지라는 사실이 의아할 법도 하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리아는 오랜 내전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감소했다. 자연스레 일할 사람은 줄었고 안전지대에 사는 부유층 저택에서도 일손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이들은 기꺼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지갑을 열었다. 게다가 인신매매 여성의 값싼 임금은 수요를 더욱 촉진하는 효과를 낳았다.

고용 대행사는 여성들을 악랄한 수법으로 속였다. 두바이 공항에 도착한 필리핀 여성들의 관광비자를 압수한 뒤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UAE에서 취업을 못하게 했다. “시리아는 살기 좋고 급여가 높다. 일주일에 하루는 휴가도 쓸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여성들의 귀를 막았다. 시리아행을 거부하는 여성에게는 모진 학대와 폭언이 가해졌다.

시리아에서 삶은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18시간 동안 쉼 없이 일해야 했다. 폭행과 급여 떼먹기는 기본이고 주인으로부터 성폭력까지 당한 노동자도 있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 상공에서 바라본 다마스쿠스 전경. 다마스쿠스=EPA 연합뉴스

시리아 다마스쿠스 상공에서 바라본 다마스쿠스 전경. 다마스쿠스=EPA 연합뉴스

2018년부터 시리아에 체류 중인 플로르델리자 아레졸라(32)는 “고용주가 수시로 뺨을 때리며 벽으로 머리를 밀쳤고, 9개월 동안 월급을 주지 않아 결국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용주가 잠든 틈을 타 집 담을 넘어 다마스쿠스에 있는 필리핀 대사관으로 탈출했다.

많은 여성들이 기회를 엿보다 아레졸라처럼 필리핀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대사관은 또 다른 ‘감옥’이었다. 온 종일 숙소에 갇혀 지내야 했고, 음식을 방으로 가져갔다 해서 2주간 아침 식사가 금지되기도 했다. 가족과의 연락도 차단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몇몇 여성들은 “탈출한 시리아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대사관 직원의 압력을 받은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필리핀 외교부는 WP에 “인신매매 피해자의 안전 보장을 위해 적극 대응하고 있다”고 했으나,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은 여전히 기약할 수 없다.

이인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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