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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88만원 은행 경비원의 편지 "중간착취 없이 일하고 싶어요"

입력
2021.01.29 15:00
수정
2021.01.29 19:14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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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과 같은 대우 바라지 않아
매년 재계약, 조금만 덜 불안하고 싶어


편집자주

당신은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피·땀·눈물의 대가로 월급을 받지요. 그런데 누군가 그중 수십, 혹은 수백만원을 늘 떼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노동시장의 최하부에 위치한 간접고용 노동자 100명에게 '중간착취'에 대해 묻고, 그 지옥도(地獄圖)를 펼쳐보았습니다. 중간착취를 금지한 근로기준법(제9조)은 과연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요. 시리즈의 다른 기사들과 함께 읽어 주세요.


은행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경비원입니다. 은행 보안과 손님 안내 등을 담당하죠. 한국일보가 취재한 100명의 노동자 중 한 명인 은행 경비원 임성훈(가명·36)씨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겨우 월 188만원을 받는 성훈씨. 소속 용역업체가 얼마를 떼어가는 지 모르지만, 은행 경비원들은 보통 용역업체에 월 50만~100만원 가량의 중간착취를 당한다고 합니다. 성훈씨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은행의 지점 통폐합 소식에 가장 마음 졸이는 사람은 은행 경비원이다. 일하던 지점이 폐점되면 은행원들은 다른 지점으로 발령나지만, 용역업체 소속인 경비원들은 바로 일자리를 잃는다. 25일 서울 강동구의 한 은행에 통폐합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은행의 지점 통폐합 소식에 가장 마음 졸이는 사람은 은행 경비원이다. 일하던 지점이 폐점되면 은행원들은 다른 지점으로 발령나지만, 용역업체 소속인 경비원들은 바로 일자리를 잃는다. 25일 서울 강동구의 한 은행에 통폐합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은행 경비원 임성훈 씨의 편지

은행에 방문한 고객들을 안내하는 저는 은행 경비입니다.

은행에서 일하기에 당연히 은행 직원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명찰에는 이름 석 자와 함께 용역업체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저는 지점에 파견된 용역업체의 직원입니다. 가끔 그 사실을 모르시는 분들은 저에게 “좋은 데서 일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5년 전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제 월급은 세후 130만원이었습니다. 당시 최저임금(6,030원)을 기준으로 기본급이 정해졌고, 여기에 연차수당, 연장근로수당, 직무교육수당, 식대가 18만원 정도 더해졌습니다. 적은 돈이었지만 근속 연수가 늘고 최저임금이 오르면 월급도 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으로 기본급이 매년 늘어나자 용역업체는 원래 주던 수당과 식대를 없앴습니다. 그래서 5년차인 저의 월급은 188만원입니다. 최저임금인 기본급에 매년 3만원씩 인상되는 근속 수당이 월급의 전부입니다. 이 근속수당도 최저임금이 더 오르면 언제 없어질지 모릅니다. 월급에서 점심 식대를 빼고나면 손에 쥐는 돈은 178만원뿐입니다. 식당 이모님의 배려로 그나마 식대를 10만원만 내고 있지만, 도시락을 먹어서 식대라도 아껴야 하는지 늘 고민합니다.

제가 속한 용역업체는 1년에 5일이었던 유급휴가 제도마저 2019년에 폐지했습니다. 이제는 하루를 쉬면 월급이 7만원 정도 줄어듭니다. 문제는 이런 모든 결정이 경비원들과의 합의나 의견수렴 없이 용역업체의 일방적인 문자 통보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용역업체에서는 지점이 부당한 지시를 할 경우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점의 말 한마디가 경비원의 고용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점에 대한 불만사항을 얘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은행 경비원들은 지점의 부당 지시에 따른 고충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소속돼 있는 용역업체의 일방적인 수당 폐지, 복지 축소도 그냥 따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용역업체는 매년 은행 본사와의 계약을 통해 받는 일정 금액에서 경비원의 월급을 제외하고 나머지 금액을 복지와 관리비라는 명목으로 수수료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 금액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닐 것입니다. 업체의 이익을 위해 경비원들이 받아야 할 것을 착취하고, 고통을 분담하기보단 본사와의 재계약을 위해 경비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합니다. 과연 업체가 경비원들의 노동의 대가를 가져갈 자격이 있을까요.

저는 이미 한 차례 계약 해지를 겪어본 적도 있습니다. 처음 입사했던 용역업체와 은행과의 계약이 해지되면서 저 역시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습니다. 다행히 새롭게 계약맺은 업체에 고용승계가 돼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경비원들이 고용 승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근처 지점의 통폐합으로 그 곳 경비원의 계약이 해지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지점은 올해 통폐합에는 포함되지 않아 이번 1년은 살아남았지만 내년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어 항상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행원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비슷한 대우도 바라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관리’ 명목으로 은행 경비원의 노동 대가를 중간착취 당하지 않고 온전히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더라도 매년 반복되는 재계약과 언제 마주할지 모르는 지점 통폐합에 따른 계약 해지의 불안감에서 벗어나 일하고 싶습니다. 저는 안정된 고용 환경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터랙티브] 중간착취의 지옥도 바로가기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indirect_labor/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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