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떠난 축구선수 승준이 부모
지도자는 운동장서 서슴 없이 때리고
부모는 줄 세우기·김장 모임 촌지 강요
폭력 무뎌져 맞고도 시합 이기면 웃어?
고질적 병폐 못 버티고 유럽행 선택
"비용 만만찮지만 운동에만 집중 가능"
유럽 프로축구 클럽 19세 이하(U-19) 팀에서 뛰는 축구선수 승준(가명ㆍ19)의 부친 김모씨는 6년 전 국내 초등학교 축구부에서 뛰던 아들의 성장 무대를 유럽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김씨는 언젠간 유럽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그 시기는 승준이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로 생각했다. 선수생활을 마친 뒤 지도자 생활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죄의식 없이 폭력과 부조리를 일삼는 학교 스포츠계의 그릇된 행태 속에서 아들을 계속 방치할 순 없었다. 잿빛 미래가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유럽행을 앞당겼다는 것이다.
19일 김씨가 밝힌 국내 학원축구부 운영 실태는 20세기 악습을 답습하고 있다. 제왕적 권한을 누리며 폭력을 일삼는 지도자들, 그를 둘러싼 ‘입김 센’ 학부모들의 자발적 굴종과 파벌 형성이 대표적이다. 이런 환경에선 아이들이 페어플레이 정신을 배우고 스포츠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알기는커녕 인성만 망가지고 말 것이란 우려가 컸다. 특히 축구만으로 명문대에 보낼 수 있는 체육특기자 선발제도와 이로 인해 만들어진 '스포츠 캐슬'의 신기루는 아들에게 자발적 희생양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과 똑같았다.
폭행에 무뎌져 맞고도 "더 열심히 하겠다"
전지 훈련장과 대회장에서 지켜봤던, 고교와 대학 지도자들의 폭언과 폭력은 김씨가 아들의 유럽행 결심을 굳히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수긍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한 뒤에도, 다음 경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모두가 웃으며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감독은 선수들 '군기' 잡는 것을 능력으로 여기고, ‘그래야 좋은 성적이 난다’며 그를 지지하는 부모들의 모습은 괴물이 되지 않고선 학교 스포츠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김씨는 “승준이만큼은 저렇게 키우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가 우려했던 대한민국 학교 스포츠의 비극적 단면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11월 조사·발표한 인권실태 전수조사에 따르면, 신체폭력을 당한 초등학교 선수(2,320명) 가운데 무려 38.7%(898명)가 ‘폭행당한 이후 감정’을 묻는 질문에 “(운동을)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에서 초ㆍ중ㆍ고 학생선수 6만3,211명(응답자 5만7,557명) 가운데 9,035명이 언어폭력을 경험했고, 신체폭력(8,440명)과 성폭력(2,212명)을 경험한 학생도 적지 않았다. 김씨 부자가 한국을 떠나는 게 최선인지를 되묻는 게 무색해지는 현실이다.
아이가 선배면 부모도 선배? 줄 세우기와 파벌 다툼
김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벌어지는 학부모들 간의 파벌 다툼을 한국 엘리트 스포츠계의 고질적 병폐로 꼽았다. 부모들 입김에 특정 선수들의 출전 여부까지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숱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김씨의 경우 승준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부터 ‘부모 줄 세우기’를 경험했다. 6학년·5학년 선수 부모회의 회장과 총무가 이를 주도했다. 같은 학년 선수들 가운데 가장 실력 좋은 아이를 둔 부모가 회장을 맡는 관행에 따라 고학년 부모들은 김씨에게 4학년 부모회 회장을 맡을 것을 권유했지만, 김씨는 거절했다. 그는 “언젠간 유학을 보낼 생각이었고, 아이를 주장 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대회나 전지훈련 때마다 지도자에게 술 접대하는 관행도 따르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부모 회장직을 거절하자, 피해가 아들에게 돌아왔다. 잘 뛰던 승준군은 별다른 이유 없이 경기에서 제외되는 날이 잦아졌다. 학부모들도 김씨를 멀리했다고 한다. 김씨는 “어떤 보직이라도 맡으라는 부모들 요구에 감사 자리를 맡게 됐는데, 회장과 총무가 사적으로 마신 술값을 회비로 계산한 것을 여러 번 지적했더니 부모들이 나를 멀리했다”고 했다.
촌지 전달식 된 김장, 그리고 1억 모으기
김씨는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 전학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듬해 옮겨간 새 학교에선 뜻밖의 ‘김장 문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들이 기숙사에서 소비하는 김치를 부모들이 담근다는 취지였는데, 알고 보니 김장을 빙자한 ‘학부모 줄 세우기’와 ‘촌지 전달식’이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초등학생 부모가 아이 입시 로비를 위해 ‘1억 모으기’를 시작했다고 얘기하는 모습에서 한국 학원스포츠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김씨 아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유럽의 유소년 클럽에 입단해 학교와 분리된 축구클럽에서 공을 찼다. 연령대 팀에서도 1~3부로 나뉜 클럽 시스템 속에서 꾸준한 출전 기회를 얻어가며 성장했다. 그간 유럽에서 지출한 축구클럽 비용은 한 달에 1,300유로(약 174만원). 물론 만만치 않은 금액이지만, 매달 100만원 이상(중·고교 축구부 기준)의 기본 회비에 대회 출전비, 전지훈련비, 김장비, 그리고 졸업 전후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쏟는 노력과 비용까지 감안하면 국내보단 훨씬 나은 조건이라는 게 김씨 설명이다.
되풀이되는 논쟁, 해외 향하는 또 다른 승준이들
김씨가 겪은 악습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되풀이되며 축구선수로 성장하는 아이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부모들을 괴롭히고 있다. 수도권 중학교 축구클럽 폭행사건(본보 19일자 1면)이 보도된 이날도 오전부터 3만 6,000여명 회원을 둔 온라인 커뮤니티 ‘축구선수 학부모연합회’ 게시판엔 선수 부모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특히 자신을 현직 지도자라고 밝힌 A씨가 "폭력이 정당화되진 않지만 10년 전만 해도 군대에서 구타도 있었고, 학교에서 체벌이 가능했다"며 "박지성(40)도 맞으며 축구했다"고 했다. 폭력을 '하나의 추억이자, 그 때의 문화'로 치부한 그의 주장은 부모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한 부모는 "10년 전에는 지도자가 체벌해도 되는 법이 있었느냐"고 되물었고, 또 다른 부모는 "체벌과 학교폭력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어른들이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자성조차 없는 국내 학원스포츠 현실에 신물이 난 학생과 부모들은 해외 클럽 문을 두드리고 있다. 독일 내 하부리그 유소년 클럽 코치를 맡고 있는 B씨는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재작년까지 유럽으로 넘어오는 선수들이 증가하는 추세였다"며 "2010년 전후까지는 우수 선수가 선진 축구를 배우러 유럽행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엔 성장 초기부터 한국 엘리트 시스템 대신 유럽 클럽 시스템을 선택한 경우가 많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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