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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 숨어든 '지배의 욕망'… 지인 얼굴 합성한 음란물 난무

입력
2021.06.07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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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인 능욕'으로 번지는 딥페이크 범죄

편집자주

‘묻지마 범죄’라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상 범죄’가 늘고 있다. 범행 동기는 물론 방식과 대상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괴기한 범죄들이다. 이상 범죄 증가는 결국 우리 사회가 이상 사회로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경고다. 한국일보는 ‘신(新) 이상 범죄의 습격’ 연재를 통해 사회적·심리학적 부검을 시도한다. 범죄를 막을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범대를 다니던 20대 여성 A씨. 그는 지난해 11월 임용고시 1차 시험을 앞두고 충격과 절망에 휩싸였다. 수험표 출력을 위해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시험 접수가 취소됐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황한 A씨가 교육청에 문의했지만 "본인 계정을 통해 취소가 이뤄졌기에 구제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스스로 시험 접수를 취소한 기억은 없었기에, A씨는 누군가의 해킹을 확신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 결과 원서 접수 계정을 해킹한 범인은 A씨의 중학교 남자 동창 윤모씨였다. 같은 사범대 재학생이나 임용고시 경쟁자의 범행일 것으로 짐작했던 A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 황당한 일은 따로 있었다. 접수 취소가 있기 한참 전 윤씨가 A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해킹하고, 이곳에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A씨 사진을 합성한 음란물을 올린 것이다. SNS에 있던 A씨 사진을 합성물 재료로 삼았고, 계정 소유자만 볼 수 있는 '셀프 전송' 방식으로 업로드했다. 윤씨가 이렇게 만든 음란물을 외부에 유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당 SNS에 한동안 접속하지 않았던 A씨는 경찰을 통해 바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고 나서야 윤씨가 올려놓은 합성사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 A씨의 얼굴 사진을 남녀 간 성행위 또는 여성 나체 사진에 합성한, 딥페이크(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특정인 얼굴을 영상물 등에 합성하는 것) 제작물이었다. 윤씨는 A씨의 SNS 계정에 허위 음란물을 만들어 올리다가 종국에는 A씨의 미래가 걸린 임용 시험 접수까지 손댄 것이다.

짝사랑 마음 얻으려 허위 음란물 전송?

전주지방법원은 정보통신망법 위반과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윤씨에게 4월 28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검거된 후 줄곧 묵비권을 행사하던 윤씨는 재판에서 범행 이유를 일부 털어놨다. 윤씨는 "어릴 적부터 A씨를 좋아했지만 소심해 다가갈 수 없었다"며 "A씨 SNS로 합성물을 보내면 A씨가 계정 해킹 사실을 짐작하고 컴퓨터를 잘하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합성물 제작에 성적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에겐)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겨준 후에 그 반대급부로 피해자의 지지와 의존을 얻음으로써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었다"며 윤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의 임용 시험 접수를 취소시킨 데 대해서는 "잘못된 방향의 호감으로 피해자의 장래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고 판시했다. 윤씨는 지난달 7일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며, 현재 2심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연예인에서 지인으로 확대... 딥페이크 성범죄 기저엔 '수동적 공격성'

지인 대상 딥페이크 불법합성물 제작자 검거 주요 사례. 그래픽=김대훈 기자

지인 대상 딥페이크 불법합성물 제작자 검거 주요 사례. 그래픽=김대훈 기자

네덜란드 사이버 보안 연구회사 딥트레이스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온라인상에서 확인된 딥페이크 영상 1만4,000여 건 가운데 윤씨의 범행과 같은 류의 디지털 성범죄 영상 비율은 96%에 달했다. 딥페이크 기술이 곧 성범죄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국내에선 해당 기술이 이른바 '지인 능욕' 범죄와 결합해 더 큰 폐해를 부르고 있다. 기술이 도입된 초반엔 여성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합성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가해자가 알고 지내는 일반인들의 사진을 재료로도 합성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픈 채팅방이나 공개된 SNS 계정, 해외 사이트 등을 통해 이를 상업적으로 배포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가해자들 스스로가 '지인 능욕'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아는 사람을 불법 합성물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온라인 성범죄자들이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지배감과 통제력을 좇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가해자들은 불법 합성물을 단순한 놀이쯤으로 생각하는데, 현실의 대상을 이 같은 놀이에 끌어들임으로써 내가 타인의 인생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딥페이크 음란물은 가해자의 '수동적 공격성'과 관련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오프라인상 강력범죄가 적극적 공격성의 결과라면, 온라인 성범죄는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도 익명성에 기대 특정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 공격성의 작동 사례"라고 설명했다. 현실 세계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이들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온라인에 숨어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바깥엔 나서지 못하는 이들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단순 음란물보단 직접 제작한 딥페이크 음란물이, 그리고 공인보단 지인을 겨냥한 범행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받을 수 있는 더 좋은 통로가 된다"고 분석했다.

제동 안 걸리면 오프라인 성범죄로 진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지금도 여전히 SNS상에 '지인능욕'을 검색하면 지인 사진과 음란물을 합성해주겠다는 내용의 계정들이 다수 발견된다. 트위터 캡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지금도 여전히 SNS상에 '지인능욕'을 검색하면 지인 사진과 음란물을 합성해주겠다는 내용의 계정들이 다수 발견된다. 트위터 캡처

이 같은 수동적 공격성이 언제까지나 온라인상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순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범죄 행위가 제대로 단속되거나 처벌받지 않는다면, 가해자들은 이를 사회적 용인으로 받아들여 오프라인상 강력 성범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더 심화된 범행을 저지르면서 존재감을 더욱 강하게 확인받고 싶어하는 범죄심리를 감안해 최대한 일찍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7년 초 인터넷 음란 사이트의 합성사진 게시판에서 활동하던 B씨는 그곳에서 알게 된 C씨를 상대로 그릇된 승부욕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C씨보다 더 많은 '지인 능욕' 사진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오프라인 불법 촬영으로 이어졌다. B씨는 경찰 조사에서 "내 게시물이 C씨보다 많으면 우월감을 느끼게 됐고, 한발 나아가 지인들의 신체 부위를 몰래 촬영해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진술했다.

B씨는 2017년 8월 불법 촬영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사할 집의 페인트칠 작업을 도와달라"며 10년간 친구로 지내온 피해자를 불러냈고 작업이 끝난 뒤 "샤워를 하고 가라"고 권유했다. 화장실 수납장에 숨겨둔 휴대폰으로 피해자의 샤워 장면을 촬영하려는 술수였다. 해당 동영상은 '경쟁자' C씨에게 곧바로 전송됐다. 거침없어진 B씨의 불법 촬영 행각은 이후 1년 반가량 여러 피해자의 치마 속, 성관계 장면 등을 몰래 촬영하는 수준으로 번졌다.

10·20대 비율 압도적… 처벌 강화로 경각심 높여야

불법합성물 제작 피의자 검거 현황 그래픽=김대훈 기자

불법합성물 제작 피의자 검거 현황 그래픽=김대훈 기자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에는 일정 수준의 편집 기술이 필요한 만큼, 검거된 피의자 대부분은 이런 기술에 밝은 10대와 20대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딥페이크 기술 등을 악용한 불법 합성물 제작·유포 행위를 집중 수사한 결과, 검거된 피의자 94명 중 19세 미만이 65명(69.1%), 20대가 17명(18.1%)이었다.

젊은층 사이에 합성물 제작이 범죄라는 인식이 옅다는 점도 문제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도 청소년들이 불법 합성물 범죄를 장난이라거나 처벌받지 않는다고 잘못 생각하고 범행을 저지른다"며 "하지만 이런 행위는 심각한 성범죄이며,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처벌을 위한 제도적 논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앞서 딥페이크 등 합성 기술을 이용한 허위 음란물은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만 다뤄지다가, 지난해 6월부터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에 따라 제작 및 배포 행위 자체를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온라인 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특정돼 처벌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검거 후에도 가해자에게 성적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 증명돼야 성폭력처벌법을 적용할 수 있어 한계는 여전하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센터 대표는 "피해자 의사에 반한 음란물 제작은 가해자 의도와 관계없이 심각한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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