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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땐 전우애 망쳤다 꼬리표" 성폭력 꾹꾹 참는 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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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신고땐 전우애 망쳤다 꼬리표" 성폭력 꾹꾹 참는 여군

입력
2021.06.07 04: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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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들이 본 군 성폭력 대응 문제>
성고충 상담관에 정식 고발했더니
피해자 앞서 상관 수십명 책임 추궁
분리 조치 명목 피해자만 옆사무실로
'말로만 해결' 가해자가 계속 업무 지시
국선변호인도 소극적… 법률 조력 한계
장기복무심사·진급? 등 인사 불이익 뻔해
"해결은커녕" 여군 대다수 신고 않고 침묵

5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이모 공군 중사의 빈소에서 동료 부대원이 조문하고 있다. 뉴스1

5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이모 공군 중사의 빈소에서 동료 부대원이 조문하고 있다. 뉴스1


"공식적 신고와 상담 창구는 있죠. 그러나 '이런 시스템이 있으니 안전하다'고 느끼는 여성 군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돌아가신 중사님은 현 체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대응을 했지만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군의 현실입니다."

현직 공군 B씨

현역 공군 하사 A씨는 지난해 영내에서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문제 제기 후 지속된 부대 내 따돌림과 손가락질이 A씨에겐 더 큰 고통이었다.

군을 가족처럼 여기라는 말을 믿고 상급자에게 최초 보고한 게 A씨 발등을 찍었다. 보고 직후 A씨 자리는 부대 내에서 가장 열악한 쓰레기장 옆 사무실로 옮겨졌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즉시 분리조치라는데, 정작 가해자는 원래 있던 자리를 지켰다. 가해자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으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해결해주겠다"는 말만 있었을 뿐, 직속 상관은 A씨를 수주 동안 방치했다.

견디다 못한 A씨는 결국 민간인 성고충 전문상담관에게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그러나 정식 절차를 밟으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쉽게 무너졌다. 신고자 보호는커녕 소속 부대 지휘관이 상관 수십 명을 집합시킨 뒤 A씨가 보는 앞에서 책임을 추궁하는 일이 벌어졌다. A씨는 "어떤 선택지가 있어도, 모두 피해자가 떠안는 구조"라며 군내 성폭력 대응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일보가 최근 만난 현역 여성 군인들은 부대 내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뒤 조직적 2차 가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이 중사 사건은 군대 내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자신도 복무 중 성폭력 피해와 신고 경험이 있다고 고백한 이들은 "진급과 장기복무 심사에서의 인사 불이익이 뻔한데 누가 선뜻 신고를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특히 "타 부대로 전출 가더라도 내부고발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어 계속 2차 피해를 당하는 구조"라며 군 성폭력 대응 시스템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스스로 주입했던 소속감이 되레 발목"

장기복무심사제도는 성폭력 피해를 당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침묵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성폭력 피해 군인 상당수가 장기복무심사를 앞둔 부사관급 신분이라는 통계는 해당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군 인사평가에서 강조되는 '전우애'는 2차 가해로 돌아오기도 한다. 현직 공군 B씨는 "통상 임관 5년차가 되는 매년 2월 장기복무심사를 하는데, 성폭력 피해 여성 군인들은 해당 시기에 피해를 입을 때가 많다"며 "심사에 지휘 추천과 근무평정이라는 인적 평가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피해를 당해도 참고 넘어가는 일이 허다하다"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해자는 처벌을 받고도 군에 남을 수 있지만 피해자는 스트레스와 따돌림 등으로 결국 군을 떠나야 하는 모순도 반복된다. A씨가 성폭력 피해를 상급자에게 최초 보고한 것도, 정식 신고 절차를 밟을 경우 입게 될 피해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사건 진행 상황 묻는 국선 변호사

군 성폭력 피해자는 법률적 도움을 받는 데도 한계가 있다. 군 당국이 선임하는 국선 변호사는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게 피해 군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부대 내 성희롱 피해 신고 경험이 있는 현직 공군 C씨는 "군사법원에서 공판기일이 잡힐 때마다 변호사를 대동하느냐고 물었지만 국선 변호인들은 피의자와 피해자 연락을 중재해주는 정도의 일만 한다고 했다"며 "공판 날짜조차 변호사가 아닌 검찰 연락을 통해 알았다"고 말했다.

C씨는 "결국 국선변호사가 한 일은 가해자들의 선처 요청 편지와 가해자 변호사가 내게 훈수하는 편지를 전달하는 것뿐이었다"며 "그 외 행정적 문제들도 마치 혼자 재판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직접 법원 주사보들에게 물어가며 처리했다"고 토로했다.

현역 육군 하사 D씨는 "피해 군인들은 군내에서 국선변호사가 어떤 경로로 배정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면서 "해바라기센터(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등 외부 인권 단체 등을 통해 변호사를 연결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해자 분리하면 끝? "모두 연결된 군"

군검찰이 성추행 피해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부사관 사건과 관련해 공군본부 군사경찰단과 관련 비행단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서 가운데 4일 오전 충남 계룡대 정문에 공군본부 현판이 보이고 있다. 뉴스1

군검찰이 성추행 피해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부사관 사건과 관련해 공군본부 군사경찰단과 관련 비행단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서 가운데 4일 오전 충남 계룡대 정문에 공군본부 현판이 보이고 있다. 뉴스1

폐쇄적 계급사회라는 군 특유의 문화는 성폭력 사건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고질적 문제로 지적된다. D씨는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는 끝이 아닌 2차 가해의 시작"이라며 "지휘부는 지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합의를 종용하거나 피해자를 나무라는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D씨도 이런 군 문화를 잘 알기에, 피해 경험이 여러 번 있었는데도 결국 신고하지 못했다.

D씨는 성폭력 신고 후 간부들끼리의 담합 및 증거 은폐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휘부를 분리하거나 즉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상급자로 갈수록 군은 모두 연결돼 있고, 다른 부대로 이동해도 관련자들이 지휘관이 돌아와 내 근무평정을 쌓게 된다"며 "단기적이고 허술한 모니터링으로는 피해 군인을 보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군 이미 자정능력 잃어... 성폭력 사건 일체 이관해야"

군 성폭력 실태 그래픽=박구원 기자

군 성폭력 실태 그래픽=박구원 기자

여성 군인들은 군내 성폭력 사건을 해당 부대 수사기관이 '셀프 수사'하는 모순도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대로 된 조사는커녕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놓고 회유하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공군 내 불법촬영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부대 군 경찰 소속인 탓에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B씨는 "성폭력 문제만이라도 성고충 상담관에 신고하면 바로 국방부로 사건을 이첩하거나, 외부기관을 만들어 조사를 시작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2019 군대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대 내 성희롱·성폭력 관련 고충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고 있다'는 문항에 긍정적으로 답한 여성 군인은 48.9%로 절반도 되지 않았다. 2012년 실태조사 당시 75.8%였던 것과 비교하면 7년 만에 상황이 크게 나빠진 것이다. A씨는 "적극적인 피해자 보호가 없다면, 형식적인 신고 절차만으론 피해 군인들을 안전하게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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