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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협박 피해 한국행" 재판 7년 만에 법정서 모국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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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협박 피해 한국행" 재판 7년 만에 법정서 모국어로 말했다

입력
2021.08.28 04:30
수정
2021.08.28 07:0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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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신청자 A씨 재판 참관기]
2014년부터 7번 패소, 8번째 만에 '이보어' 통역
보호소 장기구금ㆍ부실한 난민조사 등 우여곡절
그래도 "응원해준 한국 시민들에게 감사" 전해


나이지리아 출신 난민 신청자 A씨가 지난달 16일 난민불인정결정 취소소송 항소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을 찾았다. 2013년부터 3번의 소송과 7번의 패소를 거친 그는, 이날 처음 법정에서 모국어인 이보어로 말할 수 있었다. 박주희 기자

나이지리아 출신 난민 신청자 A씨가 지난달 16일 난민불인정결정 취소소송 항소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을 찾았다. 2013년부터 3번의 소송과 7번의 패소를 거친 그는, 이날 처음 법정에서 모국어인 이보어로 말할 수 있었다. 박주희 기자

회색 반팔티 차림의 나이지리아인 난민 신청자 A(39)씨는 법정의 원고석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10년 전 나이지리아를 탈출할 때 가지고 온 그 옷을 입고서.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 1별관 제306호 법정. 그날, 그곳은 A씨에게 특별했다. 일곱 번 패소한 뒤, 여덟 번째 재판에서 처음으로 모국어이자 토착언어인 이보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다.

“10년 전 토착종교집단으로부터 살해협박을 받아 한국에 왔고, 약 5년간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구금생활을 했습니다. (중략) 보호소를 나온 뒤에도 (사회활동을 할 수 없어) 한국에 오면서 가지고 온 옷을 지금도 계속 입고 있습니다.”

재판정의 왼쪽 원고석에 앉아, 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직원을 옆 피고석에 두고 그는 말했다.

그가 10년간 한국에서 겪은 상황은 이렇다. 화성보호소에서 4년 8개월 동안 사실상 불법 구금을 당하고, 난민 재판에 호송해달라는 요구를 거부당하고, "나이지리아에 증인이 있으니 전화해서 조사해 달라"는 요청 또한 묵살당하며 패소를 거듭했다. 법정에서는 물론, 난민신청을 할 때도 이보어 통역을 받지 못해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현재 체류는 가능하지만 일을 하는 건 허용되지 않아 시민단체와 변호사가 주는 용돈으로 힘들게 버티고 있다. 그나마 공익소송 지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과연 이번 재판 결과는 달라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울분의 이유

난민불인정결정 취소소송 항소심. 지금 A씨가 원고로 있는 재판이다. 그가 이보어로 법정에서 진술을 한 건 7월 16일, 8월 20일 두 차례였다. 모두 똑같은 회색 반팔티 차림이었다. 20일 재판에서도 A씨는 “여러분(재판부)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며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다.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아프리카 소수민족 언어가 한국 법정에서 울려 퍼진 건 처음이다. 그의 발언은 같은 나라 출신인 통역인의 입을 통해 영어로 바뀌었고, 한국인 통역인은 이를 다시 한국어로 재판부에 전달했다.

지난달 16일에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해에 따른 것이었지만 A씨가 겪어온 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중통역을 통해 A씨의 사연을 건네 들은 재판부는 그에게 한 번 더 변론 기일을 진행할지, 아니면 바로 선고 기일을 정해도 좋을지 물었다.

두 번의 통역을 통해 이를 전해들은 A씨가 느닷없이 언성을 높였다. 그는 “(나를 구금했던) 그들(화성보호소 측)은 나에게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나는 1년, 2년, 3년, 4년을 기다렸다. 선고까지 더 기다리라고?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라며 날 선 발언들을 쏟아냈다. 법정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 A씨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인권 활동가들이 그에게 재판장의 의도가 그 뜻이 아님을 설명했고, A씨는 결국 추가 변론 기일을 요청했다. 재판을 마친 후 A씨는 “다시 긴 시간을 기다리라는 것으로 오해했다”며 멋쩍어 했다.

이보어 통역 못 구해 재판 연기만 세 번

한국에서의 재판은 기다림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이번 항소심에서만 세 번의 재판이 헛돌았다. A씨는 올해 3월부터 거의 매달 한 번씩 거주지인 경기 성남에서부터 서울 서초구를 오갔다. 별다른 벌이가 없는 그에게는 이렇게 한 번씩 법원을 오가는 것도 경제적으로 꽤 큰 부담이다.

그는 매 재판 참석 전에 이보어 통역을 요청했지만, 지난달 16일 네 번째 재판 전까지는 한 번도 통역인이 법정에 온 적이 없다. 법원에서도 이보어 통역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각급 법원에는 28개 언어 1,129명의 통ㆍ번역인이 등재돼 있지만, 이 중 아프리카 일부 토착언어를 할 줄 아는 이는 없다.


A씨가 올해 3월, 항소심 첫 재판일을 맞아 서울고법을 방문했을 때 모습. 긴 소매 옷을 입어야 할 계절에 시작된 재판이지만, 이 재판은 통역을 구하지 못해 그가 반팔 티셔츠를 꺼내입을 때까지 세 차례나 연기됐다. 박주희 기자

A씨가 올해 3월, 항소심 첫 재판일을 맞아 서울고법을 방문했을 때 모습. 긴 소매 옷을 입어야 할 계절에 시작된 재판이지만, 이 재판은 통역을 구하지 못해 그가 반팔 티셔츠를 꺼내입을 때까지 세 차례나 연기됐다. 박주희 기자

결국 재판부가 피고측인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이보어 통역을 구해달라고 요청했고, 통역인이 참석하게 됐다. A씨가 앞선 소송에서 패소를 거듭하는 동안, 법원이 미리 통역자를 수소문해서 이보어 통역이 이뤄졌다면 결과가 혹시 달라졌을까.

한국에 온 후 10년의 긴 시간 동안, 그가 이전에 이보어 통역을 지원받은 것은 단 한 차례다. 화성보호소에 구금돼 난민조사를 받을 때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에서 난민신청 절차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화성보호소에 무려 4년 8개월간 구금됐다. 세 차례의 난민신청과 불허, 또 세 번의 소송(일곱 번의 재판과 패소)을 거치는 동안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40줄을 바라보는 그의 지난 시간은 늘 숨죽여 살아야 하는 인생이었다.

헌법소원을 내고서야 5년 만에 보호소에서 풀려나

한국일보는 A씨의 사연을 국내 난민 인정 20주년을 맞아 소개(2월 15일 6면)한 적이 있다. 그는 생후 8개월에 홀로 됐다. 기독교인 아버지가 토착종교의 제사장이 되라는 제안을 받은 뒤 아내, 아들을 데리고 달아나다 교통사고로 부모 모두 숨졌다. 그 후 A씨는 아버지의 친구인 B목사 집에 숨어 살았고, 2011년 토착종교는 A씨를 찾아냈다. A씨는 살해협박 편지를 받았다. 결국 2012년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한국으로 도망쳐 나왔다.

A씨는 두 번째 소송 1심까지, 즉 네 번의 패소를 겪는 동안 법원에 출석한 적이 없었다. 보호소에 구금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변호를 맡았던 이정훈 법무법인 에셀 변호사는 “A씨는 한 번도 본인 언어로 본인의 상황을 어필해 본 적이 없다”며 A씨의 법원 출석을 요청했지만, 보호소 측은 “호송가능 인원이 없다”며 거부했다.

이 변호사가 2017년 '재판호송 거부로 A씨의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취지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뒤에야 A씨는 약 5년간의 구금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이 변호사는 "화성보호소는 헌재가 헌법소원을 인용할 경우 (다른 난민 신청자의 장기구금에도 영향을 끼치는 등) 후폭풍이 불 것을 우려해 헌재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A씨의 보호를 해제한 것으로 보인다"며 "헌재는 A씨가 이미 보호소를 나왔기 때문에 재판호송 거부 처분에 따른 피해가 해소됐다고 판단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황당했던 재판 과정, 인권은 어디에

이 변호사는 당시 재판부의 발언에도 충격을 받았다. 재판부는 A씨의 출석을 요청하는 이 변호사에게 “변호인이 있으니 굳이 A씨가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그렇게 A씨는 자신의 재판에 출석할 수 없었다.

현재 진행되는 재판에 변호사 없이 A씨가 '나홀로 소송'을 이어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변호사는 이번 재판에 선임계를 내지 않고 법정 밖에서 A씨에게 법률조언만 하고 있다.

A씨 혼자여서 재판부와의 의사소통에 애도 먹었다. 보호소에서 동료들에게 영어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다. 재판부가 그에게 "이보어 통역을 원한다고 사전에 요청했는데, 법원이 통역인을 구하지 못했다. 혹시 영어로는 재판 진행이 전혀 불가능한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하자,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재판부가 법원 송달문서의 주소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해당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본인 없이 진행하는 재판보다 당사자가 주체가 된 이번 재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재판에 앞서 당국의 난민조사도 부실했다. 이 변호사는 “난민 조사관에게 A씨를 돌봐준 B씨와 한 번이라도 통화를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조사관은) 한 번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법부도 B씨의 증언을 듣는데 소극적이었다. 이번 항소심 중 6월에 열린 세 번째 재판에서 A씨는 B씨와의 영상통화 연결을 요청했는데 재판부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난민 신청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제대로 조사와 심사가 이뤄지지 않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한국의 난민 인정자수가 극히 적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집계가 시작된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3.1%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심사가 완료된 것만 추려 계산한 수치다. 현재 심사가 진행 중인 난민 신청자수를 포함하면 난민 인정비율은 1.5%로 떨어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4.8%)보다 현저히 낮다.

난민법에도 없는 논리로 패소 거듭

A씨가 서울출입국·외국인청과 법원으로부터 거듭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도 도전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 거부 논리를 납득할 수 없어서다.

A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출입국사무소와 유엔난민기구를 찾아 난민신청을 시도했지만, 당시에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서 난민신청을 못 했다”며 “통역을 구하는 중에 체류기간이 지났는데, 불법체류자라는 사실 자체가 난민심사 과정에 선입견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13년 1월 화성보호소를 찾은 인권단체 사람들에게 자문을 해 첫 난민 신청을 했지만, 불허 처분을 받았다. 그는 같은 해 5월 이의신청을 했지만 이 또한 기각됐다.

이 변호사의 도움으로 이듬해 소송을 냈다. 첫 번째 재판이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땅이 넓고, 기독교 비율이 높은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 된다”는 법원의 ‘대안적 피신’ 논리로 패소했고, 이 기조는 고등법원과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증거물도 외면 당했다. 토착종교단체가 A씨에게 보낸 협박편지가 발견됐고, A씨와 이 변호사는 이를 유력한 증거로 여겨 다시 한 번 난민신청을 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6년 9월 2차 소송이 시작됐다. 하지만 2차 소송도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했다. 첫 번째 재판과 똑같은 논리가 반복됐다.

A씨와 이 변호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난민신청을 했다. 이 변호사는 “’대안적 피신’은 난민법에서 인정된 법리가 아닌, 법원이 만든 논리”라며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3차 난민신청도 불허돼 다시 소송을 냈고, 1심에서 또 패소한 후 현재 2심까지 왔다.

마지막 재판, 응원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소중한 인연이 쌓였다.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고 있는 이 변호사 외에도 각양각색의 시민들이 그를 지지한다.

지난달에 이어 이달 20일 마지막 재판에도 약 20명의 시민들이 방청석에 앉았다. 1975년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인 이동석(69)씨는 “처음 억울하게 구속됐을 때와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을 때 많은 시민들의 도움과 연대가 있었다”며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A씨의 재판을 응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제주에서 딸(6)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대만인 C씨는 “이주민 인권보호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만나는 외국인 대부분이 은연중에 추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며 “A씨 사례처럼 외국인보호소에 불합리하게 감금되는 사례도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그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고 밝혔다.


A씨를 응원하러 모인 시민들이 이달 20일 열린 마지막 재판 직후 서울고법 내 통로에서 그를 지지하는 문구가 담긴 종이 등을 들어보이고 있다.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A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법원의 방청 인원 제한 규정을 지켰으며,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모였다. 박주희 기자

A씨를 응원하러 모인 시민들이 이달 20일 열린 마지막 재판 직후 서울고법 내 통로에서 그를 지지하는 문구가 담긴 종이 등을 들어보이고 있다.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A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법원의 방청 인원 제한 규정을 지켰으며,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모였다. 박주희 기자

이날 시민들을 모아온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는 “목격자라는 무력한 자리에서,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을 함께 느껴줘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A씨는 재판 직후 이들에게 “재판 결과에 상관없이 나와 함께해 준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마음을 전했다. 그의 선고 재판은 다음 달 열린다. 쫓기는 신분인 그의 사정을 감안해, 정확한 선고 날짜는 기사에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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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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