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 우선 행정조치에 "과한 규제" 잇단 소송
‘광화문 집회’ 논란 이후 법원은 소극적 판결
세계 각국, 방역과 기본권 행사 충돌 소송전
시민사회 “일률적 제한 대신 세심 방역돼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각국에선 이른바 '방역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에서 정부는 집회의 자유와 재산권 행사 등 기본권을 제한하는 행정조치를 내리고, 시민들은 이에 불복하면서 소송전으로 비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1억 명 의무 백신 접종' 방침을 내놓자, 공화당 주지사들이 “미국인의 자유를 수호할 것”이라면서 법정 공방을 예고했습니다. 교직원 전체를 상대로 접종을 의무화한 이탈리아에서는 ‘그린 패스’(접종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직무 정지를 당한 교사들이 법원에 소송을 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패소였습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 헤센 주의 한시적 '종교집회 금지' 행정명령에 대해 “현재로선 생명과 신체에 대한 위험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반면 미국 연방대법원은 같은 해 11월 종교행사 참석자 수를 제한한 뉴욕 주 행정명령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위반했다”며 교회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①방역이냐 기본권이냐, 법원의 고민스러운 저울질
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국민의 건강권·생명권 보호를 위한 여러 방역지침들엔 필연적으로 시민들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의 행정조치들이 과도하게 기본권을 제한한다며 법원에 처분 취소와 집행정지(일시적 효력 중단)를 구하는 소송이 끊이지 않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법원 입장에선 방역이라는 공공복리와 개인의 피해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고민스러운 사건이 늘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예컨대 사법부는 지난해 ‘광복절 집회 허용 판결’로 홍역을 치렀습니다. 서울시가 8·15 광복절 도심 집회를 금지하면서 10건의 불복 소송이 제기됐는데, 서울행정법원은 이 중 2개 단체의 집회를 허용했습니다. “국민의 건강보호를 고려해도 집회 시간과 규모 등과 무관하게 일정 지역 내 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건 과도한 제한”이라는 게 당시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최 측이 신고한 인원(국민투쟁본부 2000명·일파만파 100명)보다 훨씬 많은 2만 명 가까운 인원이 한자리에 모였고 방역수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법원이 주최 단체를 믿고 허락한 자유가 방종으로 흐른 셈이죠. 광복절 집회는 ‘전국적인 코로나19 확산의 기폭제’로 지목됐고, “법원이 광화문 방역 테러를 허용했다”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
②광화문 사태 이후 법원도 우선은 ‘방역’
법원은 이후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방역당국의 집회 금지 처분은 대체로 유지하고, 집회를 일부 허용하더라도 엄격한 방역수칙 조건을 붙여 조건부 개최를 허용했습니다. 올해 광복절에는 법원이 당국의 도심 집회 금지 처분을 모두 유지해 대규모 집회가 아예 열리지 않았고요.
다른 곳에서도 법원의 ‘방역 우선' 기조는 이어졌습니다. 지난해 12월엔 집합 금지 명령으로 대면 강의를 못하게 된 학원들이 "벼랑 끝에 몰렸다"고 호소하며 집행정지 신청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면 예배 ‘19인 제한’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기독교 단체가 낸 집행정지 신청도 지난달 기각됐습니다.
③여전한 고민...“일률적 규제 아닌 세밀한 조정 필요해”
방역과 기본권, 국가 통제와 시민 자유 사이의 줄다리기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입니다. 시민사회와 법조계에서는 “방역과 기본권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이 일률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으로 과도하게 기본권을 제한하는 건 문제”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법 등 7개 인권단체 모임인 ‘공권력감시대응팀’은 지난달 발간한 ‘코로나19와 집회시위의 권리’ 보고서에서 “각 지자체는 구체적 방역 조치와의 연관 없이 전면 집합 금지 조치를 앞다퉈 시행했고, 중앙정부 차원의 가이드 역시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행정부가 구체적 근거 없이 집회 시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할 때 행정의 적법성을 심사하고 적절하게 견제하는 게 사법부의 역할이지만, 법원도 기본권 보장을 위한 보루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들은 방역당국의 목표는 '무조건적 제한'이 아닌 '안전한 집회 개최를 위한 지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지난 6월 '코로나19와 종교적 집회의 자유' 논문에서 “만원 지하철 이용과 집회 금지가 공존하는 등 방역을 위한 조치엔 문제점과 모순이 적지 않다"면서 “집회의 성격과 내용, 방식에 따른 미시적 조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고 예외 없이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④안전과 자유 균형 찾는 K방역 과연 가능할까
‘미시적 조정’ 차원에서 눈여겨볼 사례가 있긴 합니다. 법원이 방역당국의 일률적 규제가 과했다고 판단해 ‘기본권의 숨구멍’을 여는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정부도 다시 지침을 마련한 경우입니다. 지난 7월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발령에 따라 서울시가 대면 예배를 전면 금지하자, 서울 내 교회들은 효력을 멈춰달라며 집행정지를 신청했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은 이에 "20인 미만 범위 내에서 전체 수용인원의 10%까지 참석할 경우 대면 종교 활동도 가능하다”는 기준을 제시하며 인용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은 ‘50명 제한’이고, 백화점 등엔 별다른 인원 제한이 없는 상황에서 대면 종교활동만 전면 금지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게 판단 근거였습니다. 규모가 작고 고령의 신도가 많은 종교단체의 경우 현실적으로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종교 집회'를 열기 어렵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재판부는 대신 기본 방역수칙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고, 과거 방역수칙을 위반한 전력이 있는 종교단체는 허용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재판부는 “방역 조건을 엄격하게 강화하되 일부 종교행사를 허용해 방역당국이 얻고자 하는 공익과 종교의 자유를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당초 판결의 효력은 소송에 참여한 교회들에만 적용되는 것이었지만, 정부는 판결 취지에 따라 종교계 등과 협의를 거쳐 '19인 이내 허용' 방침을 새로 마련하고 이를 전체 종교시설에 적용했습니다. 앞으로도 방역당국과 전문가, 이해당사자 간의 충분한 협의와 소통으로 감염병 예방과 기본권 보장의 조화가 가능한 '세심한 K 방역'이 이뤄지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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