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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골에 놀란 터번 쓴 관중… 오일머니로 이미지 세탁 '스포츠워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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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골에 놀란 터번 쓴 관중… 오일머니로 이미지 세탁 '스포츠워싱'

입력
2021.10.24 13:00
수정
2021.10.24 13:0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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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PIF, 뉴캐슬 인수에 '스포츠워싱' 논란
'인권 탄압·참혹한 전쟁' 이미지 세탁 노렸나?
중동 트렌드 된 스포츠워싱…대규모 투자 계속

18일(현지시간) 영국 뉴캐슬 세인트제임스파크에서 열린 토트넘 홋스퍼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2021-2022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 8라운드 경기 장면. 토트넘 유튜브 캡처

18일(현지시간) 영국 뉴캐슬 세인트제임스파크에서 열린 토트넘 홋스퍼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2021-2022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 8라운드 경기 장면. 토트넘 유튜브 캡처

영국 프리미어 리그(EPL) 토트넘 홋스퍼가 '손케 듀오(손흥민·해리 케인)'의 활약에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3대 2로 이기고 승리한 날(18일 현지시간), 관중석에는 이색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터번'을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요. 터번은 이슬람교도 및 중동지역 남자들이 머리에 두르는 천입니다. 이들이 사우디 전통 옷을 입은 건 8일(현지시간) 뉴캐슬을 인수한 새 구단주 '사우디 국부펀드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를 환영하는 이벤트 성격이었습니다.

PIF는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관리하는 국부펀드로, 3억500만 파운드(약 5,000억 원)에 뉴캐슬을 인수했습니다. 뉴캐슬은 이에 따라 영국 맨체스터시티,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과 함께 오일머니로 운영되는 유럽 축구클럽이 됐습니다. 뉴캐슬이 새 구단주를 맞이하면서 단장과 감독은 작별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14년 동안 뉴캐슬을 이끈 마이크 애슐리 단장은 물러났고, 스티브 브루스 감독도 뉴캐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우디의 뉴캐슬 인수를 두고 팬들 사이에서는 환영의 박수도 나오지만 씁쓸하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스포츠워싱(Sportswashing)' 논란이 일었기 때문인데요. 스포츠워싱은 국가나 기업이 나쁜 이미지를 세탁하고자 스포츠를 이용하는 걸 뜻합니다. 이 시각에서 본다면 사우디가 인권 탄압 국가 꼬리표를 떼기 위해 거액의 오일머니를 동원한 겁니다. 중동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럽, 유럽 전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대중 스포츠인 축구를 노린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영국 축구를 판다" 인권단체들·EPL 구단들 반발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인 모하메드 빈 살만 제1 왕위계승자(왕세자). 리야드=AP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인 모하메드 빈 살만 제1 왕위계승자(왕세자). 리야드=AP 연합뉴스

스포츠워싱 논란에 곳곳에선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권을 중시하는 유럽의 가치와 배치된다며, 스포츠가 이에 악용돼선 안 된다는 항의였죠. 국제앰네스티는 성명을 통해 "이번 조치로 스포츠워싱, 인권과 스포츠, 영국 축구의 청렴성에 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앰네스티 영국 지부는 EPL 사무국에 "심각한 인권 침해에 연루된 이들이 영국 축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구단 소유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죠.

EPL 19개 구단들도 사무국에 면담을 요구하는 등 인수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을 제기했죠. 이처럼 EPL 구단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 사우디의 뉴캐슬 인수 작업이 1년 만에 급반전됐기 때문입니다. EPL의 '소유주·이사진 테스트'에는 형사 유죄 판결을 받거나 스포츠 기구에 의해 금지된 자, 승부 조작 등 축구 규정을 위반한 자는 구단주나 구단 이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데요.

PIF는 지난해에도 뉴캐슬 인수에 나섰지만, EPL 사무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우디 내 불법 중계 지원과 사우디 정부가 이를 못 본 척했다는 이유에서였죠. 또 빈 살만 왕세자가 2018년 10월 정권을 비판했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도 문제였죠.

그런데 1년 만에 사우디는 다시 시도했고, 인수 작업은 재빠르게 진행됐습니다. PIF도 영국과 국제사회의 반발을 의식한 듯, '사우디 정부가 뉴캐슬 구단 운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계약서에 관련 조항을 넣었죠. 인권단체와 EPL을 달래려는 조치였습니다.



영국에 외교 관계 꺼내며 뉴캐슬 인수 개입 압박한 사우디

8일(현지시간)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제임스 파크 스타디움 앞에서 아랍인 복장을 한 축구 팬들이 '판매 완료'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뉴캐슬 인수를 기뻐하고 있다. 뉴캐슬=AFP 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제임스 파크 스타디움 앞에서 아랍인 복장을 한 축구 팬들이 '판매 완료'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뉴캐슬 인수를 기뻐하고 있다. 뉴캐슬=AFP 연합뉴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계약서에 서명한 것과 달리 사우디 정부가 구단을 통제할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13일(현지시간) "PIF와 사우디 정부를 나눌 수 없다"는 인권활동가들의 우려를 전했는데요. 영국에 본부를 둔 사우디 인권단체인 ALQST의 나 알 한시 국장 대행은 영국 매체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 정부는 PIF를 책임지고 있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PIF를 이용한다"며 "사우디가 끔찍한 기록을 감추려고 축구를 악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권단체가 이런 의심을 보내는 건 빈 살만 왕세자가 영국 정부에 뉴캐슬 인수에 개입해 달라며 외교적 압박을 가한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디언, 데일리메일 등 영국 언론들은 15일(현지시간) 빈 살만 왕세자가 지난해 6월 26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에게 뉴캐슬 구단 인수에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는데요.

빈 살만 왕세자는 존슨 총리에게 "EPL이 사우디의 뉴캐슬 인수를 허락하지 않은 뒤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기대한다"며 영국 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경우 영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악화할 수 있다는 압박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영국 총리실은 인수 작업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죠.



아제르바이잔·UAE·카타르, 대규모 투자로 이미지 쇄신

12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A조 4차전 대한민국 대 이란의 경기. 손흥민이 선제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테헤란=연합뉴스

12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A조 4차전 대한민국 대 이란의 경기. 손흥민이 선제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테헤란=연합뉴스

'유명 스포츠 구단을 인수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국가의 부정적 이미지가 개선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워싱 효과는 아제르바이잔의 사례로 알 수 있습니다.

오일머니로 유명한 아제르바이잔은 국가 인권 단체들로부터 인권 침해를 자주 저지른다는 비판을 받아 왔는데, 2015년 라리가(스페인 프로축구 리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스폰서를 맡게 됩니다. 이후 유럽 대륙의 국제스포츠대회인 '유러피안 게임'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죠.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은 그해 수도 바쿠에서 유러피안 게임 첫 번째 대회를 개최합니다. 2016년에는 F1 그랑프리도 엽니다.

BBC는 2019년 12월 아제르바이잔의 스포츠워싱 문제를 다루면서 "검색 엔진에 아제르바이잔을 입력하면 F1이나 운동 경기가 연관 검색 상위권을 차지한다"며 "인권 탄압 단어는 밀려났다"고 전했습니다. 중동 국가 중 아제르바이잔 외에도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도 대규모 스포츠 투자로 국가 이미지 쇄신에 성공한 경우로 꼽히죠.



인권단체 "스포츠의 화려한 모습 그 뒤를 봐야"

8일(현지시간) 예멘과 국경을 접한 사우디아라비아 남부 지잔의 킹 압둘라 공항에서 폭탄이 장착된 드론이 사우디 방위군에 의해 요격돼 잔해가 땅바닥에 흩어져 있다. 현지 언론은 예멘의 후티 반군 소행으로 추정되는 이번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인 등 모두 10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지잔=로이터 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예멘과 국경을 접한 사우디아라비아 남부 지잔의 킹 압둘라 공항에서 폭탄이 장착된 드론이 사우디 방위군에 의해 요격돼 잔해가 땅바닥에 흩어져 있다. 현지 언론은 예멘의 후티 반군 소행으로 추정되는 이번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인 등 모두 10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지잔=로이터 연합뉴스

사우디가 각종 스포츠 행사 유치와 유명 구단 인수에 매달리는 건 성과를 따라가려는 전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입니다. 사우디 하면 인권 문제가 아닌 스포츠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죠.

사우디는 2019년부터 국제적 스포츠 행사 유치에 열을 올렸습니다. 세계적 자동차 경주대회인 다카르 랠리와 친환경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E, 세계 인기 스포츠인 국제 테니스 대회 유치에도 공을 들였죠. 여성 탄압이 심한 사우디가 개최하리라 상상하지 못한 여성 레슬링 경기도 열렸습니다.

사우디의 노력 끝에 이제 사우디는 스포츠 스타들이 찾아야 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2019년 말 세계적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끄는 유벤투스는 사우디 제다에서 AC밀란과 이탈리아 프로축구 슈퍼컵을 놓고 경기를 펼쳤죠. 이듬해인 2020년 1월에는 리오넬 메시가 스페인 슈퍼컵 경기를 위해 사우디를 찾았습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당시 "사우디가 인권 남용에 대한 악평을 대규모 이벤트로 가리려 한다"며 "팬들과 시청자들이 행사의 화려함과 이면을 볼 필요가 있다"고 규탄했습니다.



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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