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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잃은 이주노동자 나비드는 언제쯤 '코리안 드림'을 이룰 수 있을까

입력
2021.11.30 17: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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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안형준 침구과 전문의·건강과나눔 대표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9년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인천 부개동 이주노동자 진료센터 '희망세상'은 매주 일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진료를 하지만, 특별히 10월 마지막 일요일은 따뜻한 겨울나기 행사가 있는 날이다.

이날은 평소 봉사활동에 나오는 의사들 외에 관내 의료기관의 협조를 받아 혈액검사, 방사선검사, 위내시경, 자궁암검진 등 종합검진이 이루어지고, 독감예방 접종도 실시한다. 저소득층과 이주노동자 등을 위한 보건의료시민단체 '건강과나눔' 회원 외에도 통역안내와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학생, 일반시민, 자원봉사자들로 가득 메워지는 연중 가장 큰 행사일이다.

전날 인근 학교를 빌려 검사실과 진료실을 꾸몄지만, 당일에도 준비할 것이 많아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벌써부터 학교 정문에는 많은 이주노동자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고, 운동장에 설치된 접수대에는 '건강과나눔' 회원 외에도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건강과나눔'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 중에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말을 구사하며 통역 봉사를 하고 있는 파키스탄 국적의 나비드(가명)이다. 그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거나 아니면 항상 장갑을 끼고 있다.

나비드에겐 아픈 사연이 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전문직을 꿈꾸며 2008년 한국에 왔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일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일들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며 기회를 찾았지만 2009년 프레스 작업 중 오른쪽 손목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접합수술은 이뤄졌으나 오른손은 정상적인 사용이 불가능해졌고, 무딘 감각과 저린 통증 등 후유증으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고 당시 그는 한국말도 서툴렀고 도움 받을 곳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4,000만 원의 위로금을 받고 퇴사하는 것이 좋은 일인 줄만 알았다고 한다. 오른쪽 손을 더 이상 쓸 수 없어 직장을 가질 수 없게 된 그는 재활용 폐기물을 수집해 고물상에 납품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귀국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체류기간마저 넘겨 결국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어버렸다.

나비드를 처음 만난 건 후유증 치료를 위해 '희망세상'을 찾아오면서다. 그는 귀화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귀화하게 되면 원래 전공인 전자공학 쪽 일을 하면서,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고 싶다고 했다. 나비드는 본인도 장애를 입었음에도, 그렇게 '희망세상' 진료소에 나와 다른 이주노동자 환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했다.

코로나19로 '희망세상' 진료소에 올 수 없게 된 그와 얼마 전 통화를 했다. 접합수술 부위에 염증이 악화돼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다고 한다.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냐고 물었더니, 단골이 많이 생겨 돈도 벌어 집도 마련하였다고 오히려 자랑한다. 그런데 귀화는 여전히 쉽지 않은 모양이다. 중국 국적이었다면 벌써 귀화가 승인되었겠지만, 힘없는 나라 파키스탄 출신은 귀화의 문도 좁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성실한 그를 알아보고 주변에 도와주는 분들이 많은데, 그중 한 분이 자신을 입양해 이제 한국에 부모님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다시 귀화 시험에 도전 중이다. 한국땅을 처음 밟았을 때 20대 중반이었던 청년 나비드는 어느 덧 마흔살이 되었지만 '코리안 드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건강과나눔 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이주노동자 건강검진을 지원하고 있다

건강과나눔 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이주노동자 건강검진을 지원하고 있다

'희망세상' 진료소는 작은 규모와 자원봉사의 한계로 1차 진료만 가능하다. 그래서 중증 환자가 발생하면 실비로 치료받을 수 있는 협력 병원으로 예약을 잡아주거나, 응급환자인 경우 인천 의료원 담당자에게 즉각 의뢰해준다. 진료 중 위암, 뇌병변 등이 의심되어 협력 의료기관으로 의뢰된 경우가 있으며, 수술비가 부족한 경우 상황에 따라 모아 놓은 회비나 주변의 도움을 받아 보조해 주기도 한다. 지금은 코로나19에 따른 방역조치로 '희망세상' 진료소는 대면진료를 하지 못해, 진료가 필요한 환자에겐 관련 병원으로 안내만 해주고 있다.

과거 갑자기 내원환자수가 급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불법체류 단속이 강화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단속에 걸릴까봐 아파도 진료를 받으러 나오지 못하는 게 이들의 처지다. 이들이 음지로 숨어버리면 오히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몇년 전부터 '희망세상'에 내원하는 이주노동자가 조금씩 줄고 있다. 단속 때문이 아니라 건강보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정식 의료기관에서 진료 받을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주노동자의 빈자리를 이젠 난민 환자들이 다시 채우고 있다. 중동 국적의 인도적 체류허가자(난민)들, 사실상 집단거주지가 형성된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등이 '희망세상'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과거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우리나라에도 전국 곳곳에 많은 무료진료소가 있었다. 소득이 증가하고 건강보험이 보편화되면서 무의촌은 차츰 사라졌고, 무료진료소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그러나 사회구성이 다양화되면서 우리 주변에는 새로운 의료취약 계층이 생겨나고 있다. 국내 저소득층 아동이나 독거 노인에겐 많은 분들이 온정의 손길을 보내지만 이주노동자에겐 도움도 적을 뿐 아니라 시선마저 따갑다. 우리나라에도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먼 타국으로 돈벌이 나갔던 서럽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그때, 그 처지를 기억했으면 한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나 홀로 건강할 수는 없으며, 모두가 건강하여야 나도 건강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줬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희망세상'이 문을 닫을 수 없는 이유이다.

청천한의원 원장

청천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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