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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찾아드립니다. 대신 당신의 사연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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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찾아드립니다. 대신 당신의 사연을 들려주세요"

입력
2021.12.15 04:30
수정
2021.12.15 14:1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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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수수료' 받고 절판된 책 구해 주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윤성근 대표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 대표는 '사연 수수료'를 받고 책을 구해주는 일을 15년째 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 대표는 '사연 수수료'를 받고 책을 구해주는 일을 15년째 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20여년 전 어느 날 오후, 허리가 곧고 차림새가 말끔한 70대 노인이 헌책방을 찾아왔다. 그는 1963년 출간된 구라다 하쿠조라는 일본 작가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이 있는지 물었다. 당시 헌책방에는 그 책이 없었고 노인은 연락처를 남긴 뒤 떠났다. 반년 후 놀랍게도 바로 그 책이 헌책방에 입고됐다. 책을 찾았다는 연락에 다시 헌책방을 방문한 노인은 책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내게도 봄날이 찾아왔다”는 회상으로 시작되는, 책을 통해 이어진 젊은 시절 인연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 한 권에 얽힌 이 애틋한 사연은 당시 책을 찾아주었던 헌책방 직원 윤성근씨의 마음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훗날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헌책방을 직접 차린 윤성근 대표는 본격적으로 헌책을 찾아주고 그 책에 얽힌 사연을 수집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최근 출간된 ‘헌책방 기담 수집가’는 윤 대표가 그렇게 15년간 수집한 사연을 엮은 책이다. 지난 2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만난 윤 대표는 “책을 찾는 사람들은, 책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윤성근 '헌책방 기담 수집가'(프시케의숲)

윤성근 '헌책방 기담 수집가'(프시케의숲)

수수료를 ‘사연’으로 받는 발상은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헌책방을 운영하다 보면 절판된 도서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아요. 그런데 책을 찾는 게 시간으로 보나 비용으로 보나 품이 꽤 드는 일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찾은 책의 가격이래 봤자 몇천 원, 몇만 원 남짓이니,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거죠. 그러다 떠올린 게 사연 수수료였어요. 이래저래 글 쓸 일이 많다 보니 그 사연을 모아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이었죠.”

사연을 들려주면 책을 구해준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이 윤 대표를 찾았다. 하지만 그중 ‘쓸만한 사연’은 무척 드물었다. “15년간 1,000명 정도 의뢰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사연다운 사연은 100개도 안 된다”는 게 윤 대표 설명이다. 책에는 그 사연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29개 이야기를 담았다.

‘사랑’ ‘가족’ ‘기담’ ‘인생’ 편으로 구분된 사연은 각각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의 추억, 헤어진 친구와의 약속, 아버지의 유품, 제목도 모르는 책 등, 하나씩 단서를 추가하며 책을 찾아 나가는 여정 자체가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과정 같다. 그렇게 해서 조선작의 ‘모눈종이 위의 생’(1981),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1993) 등이 간절히 기다리는 주인을 찾아갔다.

윤성근 대표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팬이기도 하다. 윤 대표는 "만일 내가 사연 수수료를 내고 책을 구할 수 있다면, 1959년 국내에 최초로 번역된 앨리스 초판본을 찾고 싶다"고 했다. 사진은 책방 한편에 마련된 '앨리스 전시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윤 대표. 고영권 기자.

윤성근 대표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팬이기도 하다. 윤 대표는 "만일 내가 사연 수수료를 내고 책을 구할 수 있다면, 1959년 국내에 최초로 번역된 앨리스 초판본을 찾고 싶다"고 했다. 사진은 책방 한편에 마련된 '앨리스 전시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윤 대표. 고영권 기자.

15년간 책을 찾아다니며 윤 대표만의 사연도 생겼다. 한때 야구선수가 꿈이었던 의뢰인이 야구 스타 장훈이 일본에서 출간한 책을 꼭 갖고 싶다며 윤 대표를 찾았다. 그 책을 구하려 일본도 수차례 직접 방문했지만 결국 책은 찾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의뢰인은 1968년 신구문화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중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앙데스마 씨의 오후’를 찾던 의뢰인이다.

“책을 찾아드리고 2년 뒤 부고 문자를 받았어요. 얼마 뒤에 그분의 둘째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 책을 전부 처분하려 한다고요. 부친이 애틋한 마음으로 하나씩 모았을 책에 아무 관심 없는 자녀분을 보자 무척 쓸쓸한 마음이 들더군요.”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보며, 윤 대표는 오히려 “책은 생명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헌책방에 오는 책은 누군가에게 한 번 선택됐던 책들이잖아요. 그런 책을 두 번, 세 번 찾는 손님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책이 사람과 연결돼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요.” 그렇기에, 윤 대표는 이 가성비 떨어지는 거래를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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