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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설, 이름 없이 떠난 구미 여아... 출생통보제는 '더딘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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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설, 이름 없이 떠난 구미 여아... 출생통보제는 '더딘 걸음'

입력
2022.02.01 15:00
수정
2022.02.03 14:40
0 0

3세 여아 사망 사건 1년 후 돌아온 설
출생신고 안 된 채 '무명아'로 세상 떠나
시간 흘렀지만 '출생통보제' 도입은 아직

경북 구미 3세 여아 사망의 40대 친모 석모씨가 지난해 3월 17일 검찰로 송치되기 전 구미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추종호 기자

경북 구미 3세 여아 사망의 40대 친모 석모씨가 지난해 3월 17일 검찰로 송치되기 전 구미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추종호 기자

지난해 2월 10일 오후 3시, 경북 구미시 상모사곡동의 한 빌라에서 세 살배기 여아가 숨진 채 발견됐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체는 부패가 상당 기간 진행돼 미라 상태에 가까웠다. 경찰 조사 결과 아이 친모로 알려진 김모(23)씨는 2020년 8월 재혼한 남편 집으로 이사했다. 유일한 보호자가 떠나고 전기마저 끊긴 집에 남겨진 아이는 외로이 숨을 거뒀고, 이후에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적막 속에 수개월간 방치됐다.

국민적 공분을 산 이 사건은 친모의 무책임으로 빚어진 비극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충격적 사실과 함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경찰의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죽은 아이의 외할머니로 알려진 석모(49)씨가 아이의 친모이고, 3년 동안 '엄마'로 살아온 김씨가 실은 아이 언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경찰은 석씨 모녀가 비슷한 시기에 출산했고, 석씨가 자신과 딸(김씨)의 아이를 바꿔치기 한 것으로 봤다. 김씨가 낳은 딸의 행방은 여태 묘연하다.

경찰은 세 차례의 DNA 감정 결과를 근거로 석씨를 미성년자 약취 및 사체은닉 미수 혐의로 기소했다. 석씨는 끝까지 검사 결과를 부정하며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석씨는 지난해 8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이달 26일 대구지법 형사합의5부(부장 김성열)에서 진행된 항소심에서도 같은 형량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DNA 감정 결과를 볼 때 석씨가 숨진 아이의 친모이며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도 인정된다고 봤다. 석씨가 아이를 바꿔친 정확한 동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출생 신고 없이 '무명아'로 떠난 3세 여아

구미 3세 여아가 숨진 채 발견된 상모사곡동 한 빌라 전경. 김재현 기자

구미 3세 여아가 숨진 채 발견된 상모사곡동 한 빌라 전경. 김재현 기자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반전으로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구미 여아 사건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중요한 숙제를 안겼다. 아이가 출생 등록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실이 조명되면서 현행 출생신고제의 문제점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석씨는 딸을 낳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생전 '○보람'으로 불렸지만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인 김씨의 딸이 출생신고를 통해 얻은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결국 숨진 아이는 3년의 짧은 삶을 살면서 다른 아이의 이름을 빌려 쓰다가 결국 이름 없는 '무명아(無名兒)'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여수 남매 사건, 친모에게 살해된 인천 8세 여아 사건에 이어 구미 여아까지 출생 미등록 아동이 관련된 사건사고가 이어지자 출생신고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가 활발해졌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은 출생자의 부모를 '신고 의무자'로 설정한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이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아이는 국민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정규교육이나 건강검진 등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아동보호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구미 여아 사건이 발생한 지난해 우리복지시민연합 등 대구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내고 "2020년 3,912명이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부모가 고의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동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지적했다. 단체들은 "반복되는 출생 미등록 아동의 학대 사망사건 방지를 위해 정부와 국회가 관련 제도를 신속히 법제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년 지나 돌아온 설, '출생 통보제'는 아직

지난해 4월 26일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이 구미 3세 여아를 숨지게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씨에 대한 재판에 참석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재현 기자

지난해 4월 26일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이 구미 3세 여아를 숨지게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씨에 대한 재판에 참석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재현 기자

현행 출생신고제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출생통보제'다. 아동이 태어나면 의료기관 등이 지자체에 출생 사실을 통보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다. 출생통보제가 도입되면 '존재하지 않는 아동'이 줄어들고 아동복지 사각지대가 완화될 것으로 보는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해 구미 여아 사건을 계기로 제도 도입 논의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또다시 설이 돌아왔지만, 출생통보제 도입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부터 출생통보제 도입을 여러 차례 촉구하는 등 논의의 역사는 짧지 않다. 보건복지부·교육부·법무부·여성가족부 등이 2019년 발표한 '포용국가 아동정책'에도 출생통보제가 포함됐다. 하지만 출생통보제가 시행되면 의료기관의 행정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의료계의 반대, 출산 사실을 숨기길 원하는 산모가 병원 밖에서 아이를 낳고 유기하는 일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보니 논의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지난해 6월에야 정부는 출생통보제의 도입을 골자로 하는 '가족관계등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 예고했다. 정부가 출생통보제를 법제화하려는 첫 시도다. 법무부 관계자는 "개정안은 법제처 심사 단계를 밟는 중으로, 3월 중순쯤 국회에 제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출생통보제 도입을 서둘렀다면 아이들을 둘러싼 비극적 사건도 덜했을 거란 안타까움은 여전하다. 은재식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아동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보호·지원·권리 등을 받으려면 우선 인구에 잡혀야 하는데, 어른인 부모의 잘못된 생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출생통보제가 시행되고 있었다면 구미 3세 여아의 운명은 충분히 달라졌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광현 기자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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