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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11년째 이산가족” 적도 섬, 세계 유일의 한국인 고무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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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11년째 이산가족” 적도 섬, 세계 유일의 한국인 고무 농장

입력
2022.02.15 09:00
수정
2022.02.1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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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인도 잘 모르는 오지 부루에
한상 기업 코린도가 2012년 농장 조성
아내와 남매 고국에 둔 이현신 법인장
비극의 섬 변화 이끌며 주민과 상생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코이마씨가 고무 나무껍질을 벗겨 내고 있다. 껍질 선을 타고 흐르는 우유 빛깔 액체가 고무 수액이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코이마씨가 고무 나무껍질을 벗겨 내고 있다. 껍질 선을 타고 흐르는 우유 빛깔 액체가 고무 수액이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우리나라 서울에서 남쪽으로 4,585㎞ 떨어진 적도 외딴섬의 고무 농장은 오전 5시 잠에서 깬다. 낯선 고무 나무 수액의 향이 거리낌없이 스르르 코 안을 채운다. "나무 압력을 감안하면 수액을 채취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라는 설명이 따랐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있는 한국인 고무 농장.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있는 한국인 고무 농장. 부루=고찬유 특파원

약 200명이 고무 나무 곁에서 일을 시작한다. 1인당 고무 나무 500그루를 매일 책임진다. 끌처럼 생긴 도구로 나무껍질(수피)을 45도 각도로 두께 2㎜씩 벗겨 낸다. 우유 빛깔 수액이 기울어진 껍질 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포막은 다치지 않게 하는 정교한 작업이라 기계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고무 농장은 노동집약적이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의 고무 나무. 벗긴 껍질을 타고 흘러 내린 수액이 통 안에 모인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의 고무 나무. 벗긴 껍질을 타고 흘러 내린 수액이 통 안에 모인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껍질을 벗겨 내는 작업이 오전 9시쯤 끝나면 다시 첫 나무로 돌아와 수액이 떨어지는 지점에 달린 500㎖ 용량의 플라스틱 통을 챙긴다. 방울방울 떨어진 하얀 고무 수액이 통 절반 넘게 채워졌다. 모은 수액을 인근 공장으로 옮기면 농장 일과는 마무리된다. 코이마(30)씨는 "2년째 수액을 채취하는데 아침 일찍 끝내고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에서 채취한 고무 수액을 공장에서 압축해 말리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에서 채취한 고무 수액을 공장에서 압축해 말리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공장에 모인 고무 수액은 두께 4㎝ 틀에 넣어 세로 100㎝, 가로 50㎝ 크기로 압축하고 말린다. 이어 온돌이 깔린 훈증실에서 이틀간 더운 연기를 쐐 갈색으로 변한 고무는 선별 작업을 통해 1.05톤 단위로 포장돼 납품된다. 천연 고무는 자동차 타이어, 운동화, 콘돔 등의 원료로 쓰인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직원이 훈증해 갈색으로 변한 고무를 보여주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직원이 훈증해 갈색으로 변한 고무를 보여주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도 동북쪽으로 2,236㎞ 떨어진 말루쿠주(州) 부루(buru)섬의 고무 농장은 현재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운영하는 사실상 유일한 고무 농장이다. 1989년 현지 진출 기업(코데코)과 2009년 우리나라 대기업(SK네트웍스)이 인도네시아 칼리만탄(보르네오)섬에서 고무 농사를 시도했으나 이후 현지 업체에 매각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2위 천연 고무 생산국이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위치. 그래픽=김문중 기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위치. 그래픽=김문중 기자

한상(韓商) 기업 코린도그룹은 현지인조차 잘 모르는 오지 중의 오지 부루에 2012년 고무 농장(PJ법인)을 조성했다. 2017년 첫 생산을 시작했고, 현재 1,160ha에 64만3,800그루(ha당 555본)가 자라고 있다. 고무 나무는 심은 지 5~6년 뒤부터 25년 정도 수액 생산이 가능하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나무마다 고무 수액을 받는 통이 걸려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나무마다 고무 수액을 받는 통이 걸려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고무 농장은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농장을 지켜 본 주민들이 직접 찾아와 고무 나무를 심고 싶다고 요청했다. 코린도는 자체 농장을 넓히는 대신 상생을 택했다. 2019년부터 원하는 주민에게 묘목을 절반 값에 나눠 주고 생산이 이뤄지면 나머지 절반 값을 받는 식이다. 현재 200ha가 조성됐다. 생산된 고무 수액은 코린도가 전량 구매해 준다. 공유가치창출(CSV)의 본이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주민 투미디씨가 자신의 고구마밭 곳곳에 심은 고무 나무 사이에서 웃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주민 투미디씨가 자신의 고구마밭 곳곳에 심은 고무 나무 사이에서 웃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고구마 밭에서 만난 농부 투미디(48)씨는 "5개월 전 밭 곳곳에 심은 고무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며 "생산될 고무 수액의 판로도 정해져 있어 안심이 된다"고 웃었다. 그는 PJ법인이 알려준 대로 고구마 대신 향수 '샤넬 넘버5'의 원료인 닐람(nilam)도 재배할 예정이다. 닐람은 1년에 세 번, 3년간 수확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양묘장에서 주민들이 고무 나무 묘목을 돌보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양묘장에서 주민들이 고무 나무 묘목을 돌보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2012년 입도해 11년째 부루에 상주하고 있는 이현신(55) PJ법인장은 농장의 역사, 그 자체다. 제주도 6.8배 남짓(1만2,656㎢)인 섬의 21만 인구(2020년 기준) 중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중간에 거쳐간 한국인 직원이 몇 명 있지만 그 긴 세월 버틴 건 이 법인장뿐이다. 사명감이나 자긍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인 PJ법인의 이현신 법인장이 새벽에 모은 고무 수액을 보여주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인 PJ법인의 이현신 법인장이 새벽에 모은 고무 수액을 보여주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이 법인장은 "나무껍질을 벗겨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현재 지구상에 천연고무를 100% 대체할 물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안쓰럽지만 농장의 나무들은 모두 자식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는 "제가 낳은 남매가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게 늘 아쉽지만 아내 덕분에 잘 커 줘서 감사할 따름"이라며 "이산가족 신세지만 매일 고무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위안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남아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공호. 허리 위까지 차오르는 수풀 속에 있다. 주변에 폭탄이 떨어져 생긴 구덩이가 많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남아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공호. 허리 위까지 차오르는 수풀 속에 있다. 주변에 폭탄이 떨어져 생긴 구덩이가 많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사실 부루는 아픈 역사를 여럿 품고 있는 섬이다. 식민주의 시대엔 향신료를 탐하는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지(死地)였고, 수하르토 군부 독재 시절엔 1만2,000 정치범들의 수용소였다. 최근(2015년)에서야 인도네시아 국가 식량기지로 부름을 받았다. 한국인의 유일한 고무 농장은 그보다 3년 앞서 섬을 시나브로 변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한국인 고무 농장. 부루=고찬유 특파원

해 질 녘 밀림 속에 자리 잡은 숙소 마당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특별히 준비한 삼겹살과 라면 한 그릇을 이 법인장과 나눠 먹었다. 그는 내년에 결혼하는 딸의 상견례를 위해 이달 중순 예정된 고국 나들이에 들떠 있었다. 적도의 달과 모기떼가 섬에 둘뿐인 한국인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고무 나무에서 흘러 내린 수액이 방울방울 통으로 떨어지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고무 나무에서 흘러 내린 수액이 방울방울 통으로 떨어지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부루(말루쿠)=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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