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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마녀는 21세기에 '극단적 페미니스트'라 불린다

입력
2022.03.12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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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위기에 처한 권력자들의 선택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녀로 판명된 여인을 화형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목판화. 19세기 책에 삽입된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마녀로 판명된 여인을 화형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목판화. 19세기 책에 삽입된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대규모 마녀사냥은 근대 초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종교 때문에 무지몽매했다고 생각하기 쉬운 중세 시절이 아니었다. 이유가 뭘까? 어떤 배경이 있을까? 과거 마녀사냥의 역사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봐 두어야 할 패턴은 무엇일까?

로마제국이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은 것은 4세기 때이지만 유럽 대륙 전체에 포교가 완료된 것은 약 11세기경이다. 가톨릭 교회는 포교 과정에서 당시 각 지역의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신앙을 인정하고 교리 안으로 통합했다. 여신 숭배는 성모마리아 신앙으로 이어받았다. 여러 남신과 여신을 믿는 다신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가톨릭 성인들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자들이 성찬식의 빵이나 성수를 훔쳐가서 퇴마 의식에 쓰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톨릭 교회 측은 새로운 신도들이 기존 신앙과 정신적 갈등을 겪지 않도록 민중 신앙이 가진 요소들을 교회 내부로 흡수했다. 가톨릭 사제가 퇴마사를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 마술을 믿는 신도들을 교회가 통제하려면 마술을 인정하는 편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가톨릭 신앙 중심의 사회에 살았어도 중세 유럽 민중들은 마녀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민간요법 치료사나 주술사 등 고대로부터 이어받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성에게 경외심은 품었지만 사악한 존재로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가톨릭 교회는 성당 외부에 괴물 조각상들을 배치함으로써 괴물들 또한 교회가 통제 가능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 사진은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가고일'이라 불리는 괴수 모양의 석조 장식물이 달려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가톨릭 교회는 성당 외부에 괴물 조각상들을 배치함으로써 괴물들 또한 교회가 통제 가능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 사진은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가고일'이라 불리는 괴수 모양의 석조 장식물이 달려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권력에겐 '악역'이 필요하다

중세 중엽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가톨릭의 교리가 정비되고 교회 조직이 탄탄해졌다. 국왕도 교황의 인정을 받아야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정통과 미신, 선과 악이 뒤섞인 민중의 사고를 보다 엄격히 지배할 수 있는 권력기반이 생기게 되자, 악역이 필요한 교회는 마녀를 발명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풍요 의식을 행하거나 점을 치고 주문을 외우며 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이제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 1400년경 마녀를 악한 존재로 규정하는 이론서가 대거 등장했다. 점점 고대 종교의 의례나 주술, 치료법을 행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상은 낮아졌다. 여기에 12세기부터 증폭된 여성 혐오 현상이 더해져, 대규모 마녀사냥이 일어날 기반이 마련된다.

마녀로 몰린 여성들은 대개 민간 치료사 역할을 하며 숲속 오두막에 살던 가난한 여성들이었다. 마을 밖 숲에 혼자 산 이유는 경작할 농토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1월 15일 '여가부 폐지론이 보여주는 것... 신성한 빵을 구워도 마녀로 몰린다' 참조)

공동체 갈등과 저항 낳은 '인클로저'

중세시대 영국 영주 주변 농지를 표현한 추측 지도로 구역들이 여러개로 나뉘어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중세시대 영국 영주 주변 농지를 표현한 추측 지도로 구역들이 여러개로 나뉘어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숲에서 혼자 살던 여성들이 근대 초에 대거 마녀로 사냥당한 역사적 배경 중 하나로 인클로저가 있다. 12세기부터 시작된 인클로저(Enclosure)는 장원 영주나 부유한 농민이 개방 농지나 경작지 인근 땅에 울타리를 치고 개인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영국의 경우 1500년까지 경작 가능한 토지의 45%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사유지가 되었다. 영주는 새로 얻은 토지를 임대하거나 목초지에 양을 키워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곡물 경작보다 적은 일손으로 가능한 목양 사업을 하기 위해 농사를 포기하고 농민들을 내쫓는 일도 흔했다.

밭이나 목초지뿐만 아니라 숲, 개울, 연못 등 마을 공유지도 인클로저 대상이었다. 이제 농토가 없는 사람들은 돈을 내지 않고는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연료, 물, 약초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인클로저 때문에 유일한 생계유지 수단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농토와 숲 등 공유지에서 추방된 소작농들과 빈민들은 떠돌이 거지가 되었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후 산업혁명 시기에 도시로 간 그들은 공장 노동자가 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인클로저는 유럽 전체로 퍼졌다. 인클로저는 농촌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임금노동을 일반화하고 농민을 도시 빈민으로 만들었다. 이에 각지에서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독일 농민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국왕과 영주들은 봉기한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교황청의 압제에 항의한 종교개혁가 루터마저 영주 편을 들어 농민 학살에 동의했다.

저항을 잠재우는 법, '마녀 몰기'와 '고립'

인클로저로 인해 숲에서 내쫓기게 되자 숲속 오두막에서 혼자 사는 민간 치료사 여자들도 저항했다. 그러자 마녀로 몰렸다. 참혹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기도 했다. 인클로저 시기에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내쫓아야 할 여성이 있다면, 목적을 이루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녀로 고발하는 것이었다.

화형대에 오르지 않고 살아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도 생존은 어려웠다. 마녀로 몰렸기에 그들의 의학 지식과 치료술은 악마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겨져 약을 제조하고 의술을 쓸 기회까지 차단당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제약술, 의술은 물론 여성의 몸에 관한 산부인과 의술마저 남성 의사들의 전문 영역이 되었다. 단지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이후 인클로저와 마녀사냥이 끝난 시기에도 산파나 민간치료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은 종종 마녀로 몰렸다.

마녀사냥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여성들의 연대를 파괴했다. 마녀로 고소당한 피고는 반드시 다른 마녀를 고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고문을 견디다 못한 피고는 아무나 아는 사람 이름을 대곤 했다. 그리하여 한 지역에서 한 여성이 마녀로 몰리면 그 지역 여성들의 인클로저 저항 조직은 일망타진됐다. 취약한 상태에 처한 여성은 도움을 받기는커녕 따돌림당했다. 마녀로 찍힐 위험이 있는 여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부장의 보호 밖에서 혼자 사는 여성들은 점점 더 고립되고 차별받고 가난해졌다.

종교개혁을 거치며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가톨릭을 공격했다. 가톨릭 교회 내부의 마술과 민간의 마술을 구분하지 않고 이단으로 여겼다. 그동안 가톨릭이 포교상 인정 혹은 묵인한 마술은 이단이 되어 금지당했다.

문제는 마술은 금지당했어도 마술이 필요한 상황은 변함없다는 점. 가족이나 가축의 급작스러운 발병과 죽음, 전염병, 기근, 홍수, 화재, 냉해 등은 여전했다.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원흉을 찾아 제거하려 들었다. 이웃 간 다툼이 잦아졌다. 누적된 갈등은 전염병이나 흉작과 같은 공동체의 위기 상황이 닥치면 폭발했다. 기회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이웃을 고발했다. 희생양은 금지된 마술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자였다. 남성인 희생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가난하고 혼자 살아서 만만한 여성들이었다. 마녀사냥이 곧 페미사이드(여성 학살)인 이유다.

지금 권력자들의 희생양은 누구인가

1634년 프랑스 출신 화가 자크 쿠르투아가 그린 30년전쟁(1618~1648년) 일부인 뇌르틀링겐 전투. 위키피디아 캡처

1634년 프랑스 출신 화가 자크 쿠르투아가 그린 30년전쟁(1618~1648년) 일부인 뇌르틀링겐 전투. 위키피디아 캡처


지방 권력은 누적된 마을 공동체 내의 갈등을 힘없는 여성에게 분출되도록 이끌었다. 갈등이 폭발하여 사회 안전을 위협하기 전에. 권력자 자신들의 기득권이 공격당하기 전에.

사료를 살펴보자. 대규모 마녀사냥은 중앙정부 주도로 일어나지 않았다. 마녀사냥으로 인한 피해자는 당시 중앙 권력이 약했던 독일과 스위스 지역에 약 3만 명 이상 집중되어 있다. 전체 마녀 처형의 3/4이 집행된 이 지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신성로마제국 영역이었는데,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립이 심각했으며 근대적 국가 공권력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지역이었다. 30년전쟁(유럽 최후의 종교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 영역을 초토화했음)이 1648년에 끝나면서 마녀사냥의 기세가 꺾인 역사적 사실도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마녀사냥/여성 학살의 원인이라는 증거다. 대규모 마녀 학살이 벌어진 1570년에서 1640년은 소빙기로 인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기, 특히 30년전쟁(1618~1648년) 기간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역사를 기억해 두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회가 위기에 처하면 누적된 공동체 내의 갈등을 힘없는 여성에게 분출하게 이끈다는 것을. 이 패턴을 잘 봐 두자. 저항하는 여성을 마녀라고 낙인찍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성들의 연대를 파괴하는 것을. 이는 현재 여성들이 여전히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21세기에는 정당한 생존권을 주장하고 폭력을 고발하는 여성들이 마녀 대신 '남성을 혐오하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로 불린다는 차이만 있을 뿐.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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