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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아이'로 각인된 헬렌 켈러의 '왼쪽' 얼굴을 아십니까

입력
2022.04.23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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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여성 장애인이 소비되는 방식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장애인 출신 미국의 유명 사회운동가인 헬렌 켈러(1880~1968년)의 성인 시절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장애인 출신 미국의 유명 사회운동가인 헬렌 켈러(1880~1968년)의 성인 시절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여기, 열정적으로 연설 중인 사람이 있다. 그는 조국인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한다는 대통령의 말을 비판하고 전쟁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약 2,000명의 청중으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는다. 이 사람은 1차 대전 전후의 미국 사회주의 운동과 여권 운동, 반전 운동의 역사에 반드시 등장하는 유명인이다. 누구일까.

이 사람의 자서전에서 유년 시절의 일화를 보자.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 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쓰셨다. (중략) 펌프 가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내게 배움의 열의를 불어 넣었다. 모든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각각의 이름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왔다." 이 사람은 바로 유명한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물 펌프를 통해 처음으로 '물'(water)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물 펌프를 통해 처음으로 '물'(water)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는 1880년 미국 앨라바마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개월 때 심한 열병을 앓고 시력과 청력을 잃었다. 일곱 살 때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난다. 설리번은 이후 50여 년간 켈러와 함께 생활하며 책과 편지, 신문을 대신 읽고 손바닥에 글씨를 써 준다. 글자를 배워 의사소통을 하게 된 켈러는 래드클리프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다. 그의 중복장애 '극복담'은 세상에 큰 감동을 주었다. 유명인사가 된 켈러는 작가이자 사회 봉사자로 열심히 살아가다 1968년에 세상을 떠난다. 이 정도가 위인전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일생이다.

중복장애에도 불구하고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삶의 소중함을 예찬했던 헬렌 켈러의 삶은 인간승리 그 자체다. 그래서인지 그의 위인전을 보면 어린 시절의 일화, 설리번 선생과의 만남, 공부를 시작한 후 어렵게 대학을 다니며 우등으로 졸업하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성인기의 삶을 다루더라도 장애인 단체 봉사활동과 맹인협회 기금 마련 연설, 여행 정도의 이야기가 약간 더해진다. 이게 다일까?

FBI가 주시한 급진적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는 88세까지 장수했으며 노년에도 왕성히 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성취는 소녀 시절에 머물러 있다. 성인이 된 후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여 어떤 발언을 하고 행동했는가에 대한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욕망을 지닌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어땠는지도. 이상하다. 성인이 되기 전 요절한 사람도 아닌데.

시각 장애인 위문을 다니던 켈러는 시각 장애인이 빈곤층에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회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된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사회주의자가 된다. 1909년에는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1912년 사회주의 신문 '뉴욕 콜'에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가가 되었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애인이 순수한 자신의 의지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유명인인 헬렌 켈러를 사회주의자가 이용하고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켈러는 즉각 반박한다. "나를 이용하는 것은 자본주의 언론이다."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한 유진 뎁스의 대중 연설 장면. 위키피디아 캡처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한 유진 뎁스의 대중 연설 장면. 위키피디아 캡처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인 유진 뎁스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헬렌 켈러는 선거 패배 후 사회당이 의회 내 정치에만 신경 쓰는 현실을 비판하고 탈당했다. 이어 전투적 노동조합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에 가입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켈러는 반대했다. "미국 내에 있는 흑인들을 차별하면서 무슨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냐"고 윌슨 대통령을 질타했다.

그는 급진적 사회주의자와 교류하고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다. 아동노동과 사형제도, 인종차별에 반대했고 여성참정권 운동(미국은 1920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에 나섰다.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칠 때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회주의자 석방 운동에 나섰다. 죽기 전까지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섰기에 당시 공산주의자 사냥을 지휘하던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그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 정도로 헬렌 켈러는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대중이 원한 건 '장애소녀'의 감동 스토리

그런데 켈러의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은 고국 미국은 물론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매카시즘과 냉전 현실, 우리나라 반공 교육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 탓이 아닐까. 헬렌은 평생 집필 활동을 했다. 22세에 쓴 '헬렌 켈러 자서전'과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1913년에 출판한 사회주의에 대한 에세이 '어둠의 밖'은 많이 팔리지 않았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헬렌이 세계 문학 서적을 원서로 읽고 쓴 문학 비평도 인기가 없었다. 이 사실은 보여준다. 대중이 여성 장애인에게 원하는 바를.

헬렌 켈러 자서전 표지. 위키피디아 캡처

헬렌 켈러 자서전 표지. 위키피디아 캡처

대중은 장애인이 세상에 대해 비판하거나 전문적 견해를 드러내는 글보다 장애 '극복'에 대해 간증하는 감동적 스토리를 원했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의 삶을 부당하게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고된 삶에 희망을 주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고 속삭여주는 순수한 천사로. 헬렌 켈러의 88세 인생에서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던 성인시절보다 소녀시절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이유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또 있다. 1919년 가을, 켈러는 비서로 일하던 피터 페이건과 사랑에 빠져 함께 도주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성인이 된 켈러는 훤칠하게 키가 크고 관능적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다. 강한 성충동을 느끼기도 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의 사랑과 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켈러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가르쳤다. 그 누구와도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여성의 기능이 출산과 양육인 사회에서 두 가지를 해낼 능력이 없는 장애여성들은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사진에 '반쪽 얼굴'만 나온 이유

언제까지나 인형을 품에 안고 선생님의 손바닥에 'd-o-l-l'을 쓰는 소녀가 아니지만 대중은 켈러에게서 숭고한 성처녀의 이미지만을 보기 원했다. 한편 친지들은 후원금의 액수를 좌우할 세상의 평판을 의식하여 그의 이미지를 관리했다. 이는 헬렌 켈러의 프로필 사진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 사진을 보자. 오른쪽 얼굴 반면만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꽃향기를 맡고 있는 젊은 시절 모습이다. 그의 외모는 균형 잡히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외모는 켈러가 시각과 청각 장애가 있어서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보고 듣지 못해 더욱 순결한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헬렌 켈러의 1904년 사진. 1911년 의안 수술을 할 때까지 오른쪽 얼굴만 나온 사진을 프로필로 사용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헬렌 켈러의 1904년 사진. 1911년 의안 수술을 할 때까지 오른쪽 얼굴만 나온 사진을 프로필로 사용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그런데 젊은 날 사진들이 모두 반쪽 얼굴만 찍혀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왼쪽 눈은 튀어나오고 일그러져 있었다. 서른 살 즈음, 순회 강연을 앞두고 외모 관리를 위해 눈 수술을 받은 후에야 정면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켈러의 맑고 파란 눈을 예찬했지만 그 아름다운 두 눈은 사실 의안이었다.

이런 이미지 조작은 일차적으로는 헬렌 켈러 기업을 운영하는 친지들 탓이지만 더 나아가 보면 근본적으로는 대중들이 여성에 대해 갖는 편견 탓이다. 여성은 외모가 아름다워야 순결해 보여야 더 관심을 받고 지원을 받게 된다. 여성 장애인인 경우는 더하다. 그리하여 켈러의 짧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숨겨진다.

설리번 선생님과 함께 있는 헬렌 켈러. 이 사진에도 오른쪽 얼굴만 나오도록 찍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설리번 선생님과 함께 있는 헬렌 켈러. 이 사진에도 오른쪽 얼굴만 나오도록 찍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여성 위인에 대한 왜곡된 기록

헬렌 켈러의 이미지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 소녀'로 굳어진 과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장애인 아닌 경우에도 여성 유명인들은 본인의 업적보다 외모와 긍정적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성차별 사회가 인정하는 여성 위인이란 남성 지배 시스템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만 성취하고, 늘 밝고 순수해서 남성의 '치어 리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여성을 위인으로 기릴 때에 전통적인 성 역할에 맞지 않는 면모 즉 세상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과격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면모, 자신의 성과 사랑을 추구하는 면모는 가려진다.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

결국 헬렌 켈러를 억압한 마지막 장애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인에,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에 대해 갖는 세상의 편견이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애여성인 헬렌 켈러를 어린 소녀로만 묘사하는 위인전은 지금까지도 사회에 나쁜 영향을 남겼다. 바로 사람들이 장애인 성인 여성을 영원한 유아로 여기게 만든 점.

박신영 작가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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