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정보·평형감각 괴리로 발생
어지럼증에 구토 등 증상까지
직장인 이성호(31)씨는 지난 2020년 가상현실(VR) 게임 '하프라이프: 알릭스'와 VR기기 오큘러스를 구매했다가 낭패를 봤다. 1인칭 슈팅(FPS) 게임의 역사를 쓴 '하프라이프' 시리즈의 후속작이었던 데다, 진일보한 VR 게임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에 큰맘 먹고 구입했지만 게임 시작 직후 30분 만에 어지럼증으로 찾아온 고통 때문이다. 이씨는 "평소 배틀그라운드 같은 3차원(3D) 게임도 심한 멀미로 오랫동안 할 수 없었는데, VR 게임의 멀미는 더 심했다"며 "앞으로 VR 기술이 활성화되더라도 굳이 이용하진 않을 것 같다"고 전했다.
최신 기술의 발달로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 시대가 성큼 다가온 가운데 'VR 울렁증'이 메타버스의 플랫폼화를 가로막는 주요 난제로 떠올랐다. 메타버스의 핵심 기술인 가상·증강현실(VR·AR) 헤드셋을 사용할 경우 사람에 따라 멀미를 심하게 느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화면 속 나'는 전력질주?
16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VR 울렁증은 3D, VR 게임 이용이나 영상 시청 시, 일부 이용자들이 겪는 멀미와 비슷한 육체적 증상을 뜻한다. 보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콘텐츠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피로감이나 두통, 구토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1990년대 3D 게임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멀미 현상은 VR기기 보급과 더불어 대중에 더 널리 알려졌다. 평면으로 된 모니터 화면보다 인간의 시야를 전부 감싼 VR 화면에서 훨씬 심한 멀미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영미권에서는 VR 울렁증을 'VR 멀미(VR Sickness)'로 지칭할 정도다.
VR 울렁증의 원인과 증상은 일반적으로 차량이나 배에 탑승했을 때 생기는 멀미와 동일하다. 멀미의 원인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감각충돌론'이다.
보통 인간은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와 귓속의 반고리관 및 전정기관의 평형감각을 통해 신체의 평형감각까지 조절한다. 그런데 시각 정보와 평형 감각에 '불일치'가 발생할 경우 뇌가 피로감을 느끼고 이를 독성물질에 의한 중독 등으로 판단, 구토 등을 통해 신체를 보호하려는 게 바로 멀미다. 예를 들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눈에 보이는 게 왼쪽이라면 뇌가 혼동에 빠진 경우가 멀미인 셈이다.
'몰입감' 높은 1인칭 시점에서 더 심해... 구토 증상도
VR 울렁증도 이와 유사하다. 멀미가 버스에 탔을 때 신체는 가만히 있지만 주변 시야는 계속해서 이동해 괴리가 발생할 때 나타난다면, 가상세계 속 멀미는 캐릭터가 괴물을 피해 달리고 총을 쏘는 등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현실세계의 이용자는 의자에 앉아서 손만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눈은 '사용자가 움직이고 있다'고 뇌에 알려주지만 귓속의 평형기관은 '사용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만 VR 울렁증은 기술적인 이유에서 일반적인 멀미보다 증상이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지연(레이턴시) 문제다. 레이턴시는 입력장치와 출력장치 사이에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시간을 뜻한다. VR 헤드셋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고개를 우측으로 돌렸을 때 즉시 디스플레이도 화면을 오른쪽으로 전환해야 감각의 괴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레이턴시가 길어지면 실제 움직임과 시각정보의 차이가 생겨 멀미 현상이 발생활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VR게임이 사용하는 1인칭 시점도 VR 울렁증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통 캐릭터의 등을 바라보며 진행하는 3인칭 시점의 게임보다 이용자 본인이 직접 세상을 바라보고 진행하는 1인칭 시점 게임에서 멀미가 자주 발생한다. 특히 최신 게임의 경우 시각적 효과를 위해 자주 시야를 흔들거나 회전하는데 이로 인해 뇌의 혼란이 가중된다. VR 게임의 장점인 '현실과 같은 몰입감'이 오히려 VR 게임을 즐기는 데 장애물이 된 것이다.
VR 멀미 방지 기술 개발도 한창
보통 멀미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두 감각기관의 정보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멀미 해소법으로 버스에 탔을 때 흔들림이 적은 앞좌석에 앉거나, 창문으로 먼 산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VR 울렁증이 이슈가 됐던 초기에도 멀미약을 복용하거나 긴 시간 게임 이용을 자제하고 휴식을 취하는 등의 해결법이 제시됐다.
하지만 VR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VR 울렁증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잇따르고 있다. 일본 소니는 세계지식재산권 기구에 VR 멀미 방지기술 특허를 공개했다. VR 헤드셋에 부착된 장치가 착용자의 머리에 진동을 가해 멀미를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내에서도 VR 멀미와 관련된 연구가 한창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지난 2020년 VR 콘텐츠 편집 도구를 개발했다. 게임 등 콘텐츠 개발자가 개발 단계에서 멀미에 영향을 미치는 시점 높낮이, 배경 그래픽, 카메라 이동 속도 등을 세세하게 조절해 멀미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한다. VR기기 업체에서는 게임에 따라 '멀미' 등급을 나눠 이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한다. 오큘러스는 VR게임을 △편안함 △보통 △움직임 많음 등의 3가지 등급으로 나눠 이용자들에게 경고한다.
레이턴시를 줄이고 뇌의 연산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와 착용형(웨어러블) 기기 등의 개발도 한창이다. 멀미를 억제하기 위해 실제와 같은 고화질 화면(해상도)을 높은 프레임(1초당 보여주는 화면 수)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VR업계에서는 VR 기기는 일반적으로 멀미 유발을 줄이기 위해 밝기 1,000니트(nt) 이상, 해상도 60PPD(Pixel Per Degree) 이상, 주사율 120헤르츠(㎐) 이상의 디스플레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트레드밀과 모션 컨트롤러, VR 슈트 등 몸을 움직이면서 게임이 가능한 장치도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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