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12년 만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출간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박노해 ‘노동의 새벽’)
노동자의 ‘햇새벽’을 부르짖으며 끝맺는 박노해(본명 박기평)의 시 ‘노동의 새벽’은 1984년 청년과 노동자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의 판매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팔린 이 시집은 그 자체로 1980년대 노동문학의 상징이었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뜻의 필명을 스스로 지은 노동자 출신의 이 시인은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1991년 체포돼 사형을 구형받는다.
1998년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던 그는 권력의 길을 뒤로 하고 생명·평화·나눔을 가치로 삼은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한다. 2003년부터는 전 세계 분쟁 지역과 가난한 현장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시인’으로 남았다. 출옥 후 12년 만인 2010년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낸 이후 또다시 12년 만에 새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최근 출간했다. 12년간 쓴 3,000여 편의 육필 원고 가운데 301편을 묶어 펴낸 것으로, 표제시인 ‘너의 하늘을 보아’를 비롯해 그간 SNS에서 인기를 끌었던 최근 시들이 엮였다.
시간은 정직하게도 흘러, 노동의 ‘새벽’을 부르짖던 20대의 청년은 어느덧 60대 중반이 됐다. 인생의 시간으로 따지면 이제는 ‘밤’에 가까울 현재는 온갖 회한으로 가득하다.
“산마을에 눈이 내리면/회상에 잠기기 좋은 밤이다/(…)/회상의 말은 나를 태우고/살아온 시간을 거슬러/주마등走馬燈처럼 달린다/(…)/내가 가야만 했으나 가지 못한 길들과/내가 해야만 했으나 주지 못한 사랑과/잘해주고 싶었으나 어찌하지 못해서/눈물겹고 애가 타던 회한의 자리로,/그 상처의 시간으로 날 데려가는 걸까”(‘회상回想의 말’)
그사이 세상은 한층 복잡해져서, 시에는 촛불집회와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생각,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팔레스타인 폭격에 대한 안타까움, 미투와 성소수자에 대한 변화하는 인식까지 더해졌다. 나아가 아이와 부모, 교육과 배움, 연애와 이별, 청춘과 노년, 독서와 여행, 고독과 관계 등 온갖 것에 대한 상념이 넘실거린다. 그런 중에도 노동자의 어떤 현실만큼은 도통 변하질 않아서, 시인은 여전히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쳐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존엄’과 ‘정의를 울부짖는 얼굴’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저기 허공에 사람이 있습니다/(…)/제발 좀 들어주세요/제발 좀 만나주세요//경제도 기업도/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정치도 법률도/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힘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함께 살아야 할 나라 아닙니까/(…)/일하는 사람들의 존엄이/정의를 울부짖는 얼굴이//허공에 매달려 있습니다/여기 사람이 있습니다”(‘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30년이나 흘렀지만 과거의 기억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여전히 고문을 당하던 그날 밤의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나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어야 할/저 어두운 시대의 악몽이 아닌가”하고 자조한다. “나에게 기적이 있다면/죽지 않고 미치지 않고/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라고 되뇌인다. (‘고문 후유증이 기습한 밤에’)
그럼에도 시인은 “시를 쓰는 것 말고는/다른 무기가 없기에” “온몸으로 쓰고 있다”(‘나의 독자는 삼백 명이다’)고 말한다. 12년간 3,000여 편이면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쓴 셈이다. 2010년 낸 시집 역시 12년간 5,000편을 쓰고 그중 304편을 엮은 것이었다. 2010년 당시 한 인터뷰에서 시인은 “수행하듯 매일 독백 같은 뭔가를 꾸준히 썼다. 하루도 시를 쓰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저주받은 시인이고/실패한 혁명가이며/추방당한 유랑자”라는 세 개의 정체성을 지고서 시인은 오늘도 쓴다. “나는 시퍼렇게 늙었고/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고/나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니”(‘취한 밤의 독백’) 운이 좋다면, 12년쯤 뒤에 또 한 권의 시집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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