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은 기념할 날들이 무척이나 많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 등 많은 기념일이 5월에 모여 있다. 마치 세상 모든 기념일을 5월에 모아놓은 듯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기념일들이 참으로 불편하다. 지갑이 가벼워지는 표면적인 이유와 내가 기념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내면적인 이유에서 그러하다.
현재 시간강사와 연구자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5월 첫날인 1일 '근로자의 날'부터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유는 나의 위치가 근로자이면서 동시에 근로자가 아닌 불분명한 위치라는 데서 기인한다. 만약 내가 근로자라면 최악의 노동환경에 처한 것이 분명하다. 시간강사로 살면서 휴일을 제대로 쉬어본 적도, 휴가를 간 적도 없다. 물론 나의 선택에 따른 것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모자란 나의 연구실적은 나에게 휴식을 허락하지도, 휴가를 허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의 공적 위치에 따른 또 다른 기념일인 '스승의 날'도 마음이 불편하다. 대학생을 가르치지만, 시간강사인 나에게 '스승의 날'이라며 인사를 건네는 학생은 별로 없다. 선물 같은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시간강사였던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렸던 것 같지 않다. 분명 시간강사 중에 좋아했던 선생님이 많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경험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이다.
반면, 챙겨야 할 스승들은 계신다. 석사학위 지도교수님은 올해 모임을 통해 운 좋게도 뵐 수 있었지만, 박사학위 지도교수님은 방학에 찾아뵙겠다며 전화 한 통으로 인사를 드린 게 다였다. 모임시간이 강의시간과 겹친 탓이다. 그리고 인사드리고 싶은 다른 선생님들이 계셨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삶이 각박해진 탓이다.
스승의 날과 비근한 무게의 불편함을 갖는 날은 '어버이날'이다. 남동생 때문이다. 부모님은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던 시대를 살던 분들이다. 그래서 부모님은 아들을 얻기 위해 딸을 넷이나 낳았다. 당연히 부모님의 사랑은 온통 아들 위주였다. 부모님은 남동생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한방에서 데리고 잘 정도로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내 차와 남동생의 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어도 아버지는 남동생의 차만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이 다 괜찮다. 문제는 부모님께서 애지중지하던 남동생이 뇌종양으로 4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버이날'은 괜스레 부모님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다. 하지만 아들이 아닌 탓(?)에 구박덩이로 자란 내가 왜 부모님을 혼자서 챙겨야 하는 건가 싶은, 모자란 생각도 아예 없지 않다. 다른 자매들이 해외에 있거나 멀리 지방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면 그런 못난 내 맘 때문에 부모님이 또 불쌍해진다.
우리가 어떠한 날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기념일을 기념할 수 없는 이들도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각자의 사정을 아우를 수 있는 기념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다만 기념일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이들도 우리 사회에 살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