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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의 삼성전자'였던 성광 성냥공장 산증인... 손윤동 전 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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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의 삼성전자'였던 성광 성냥공장 산증인... 손윤동 전 공장장

입력
2022.06.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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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공장과 이웃, 일손 거들러 갔다 취직
기계에 물 뿌려대는 소방차 진입 막기도
2016년 폐업,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키로


의성 성광 성냥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던 손윤동씨. 현재는 양봉업으로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다. 박상은 기자

의성 성광 성냥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던 손윤동씨. 현재는 양봉업으로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다. 박상은 기자

한때 '경북 의성의 삼성전자'라고 할 만큼의 위상과 BTS 못잖은 인기를 누린 인물이 있다. '의성 성광 성냥공장'의 전 공장장 손윤동(65) 씨를 놓고 하는 말이다. 손 씨는 현재 600개의 벌통을 소유하고 연 1억5,00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등 넉넉한 삶을 살고 있지만 요즘도 의성 성냥공장 직원 시절과 당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가끔 회상에 잠긴다.

손씨는 고교 재학 시절 밀링과 선반을 전공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고 만기 제대한 1983년 당시 의성의 대표 기업이었던 ‘성광성냥’에 들어갔다.

'성광성냥' 입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집 바로 옆에 성광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놀면 뭐 하냐. 나와서 일 좀 거들어라"는 친구의 말에 별 생각 없이 잠시 도와주러 간다고 들렀다가 평생 직장이 되었다.

그는 최고의 기술자로, 공장장으로 성광 성냥공장에서 24년 6개월을 보냈다. 그가 이곳에 재직할 당시 전국 이름 있는 성냥공장이라면 천안의 아리랑, 영주의 영화인촌, 논산의 비사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업체들은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대규모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손 씨가 입사했던 1980년대 성광 성냥은 중고 선반 1대와 밀링 1대가 시설의 전부였다. 그나마 밀링은 손 공장장이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입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손씨가 입사하고부터 성광 성냥은 의성 지역사회를 뛰어넘어 '성냥 제조업계의 삼성전자'로 서서히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밀링, 선반을 다루는데 탁월한 손재주와 근면 성실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남다른 애사심과 승부욕까지 겸비, 성광을 성냥 제조 업계에서 우뚝 서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성광 사장이 동종업체 대표와 미팅이라도 할라치면, 굳이 운전기사 역할을 자청해 영주, 논산, 천안 등으로 향했다. 경쟁업체 공장의 설비와 라인 구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경쟁자들 입장에서는 동종 업체 공장장이 자신들의 공장을 둘러보는 것이 유쾌할 리 만무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 어떤 부탁을 들여서든 간에 공장 안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외국에서 갓 들여온 최신 장비의 경우 현장에서 기계의 구조와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때론 곁눈질해 본 설비를 화장실에 가서 스케치하고 회사에 복귀한 날 저녁부터 직접 기계 제작에 들어갔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산업스파이 노릇까지 한 셈이다.

회사는 이 같은 그의 노력을 높이 사 월급 외에 적잖은 보상을 해주기도 했다, 설비가 한 대씩 추가될 때마다 당시에는 큰돈이던 20만원씩을 추가로 지급했다. 일에 대한 보람과 재정적 보상에 고무된 20대 사나이는 더욱 힘차게 달려 나갔다.

성광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냥 제조의 모든 공정, 공장 내 모든 설비기계를 자체 운영, 수리할 수 있게 됐다. 더욱이 필요할 경우 특정 기계 설비를 자체 제작까지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성냥 공장으로까지 발돋움했다.

한때 성광은 300명 가까운 직원이 근무할 정도로 번성했다. 그 가운데 직원으로는 아저씨 18명, 아줌마 4명, 서너명에 불과한 총각에 나머지는 모두 어여쁜 의성 아가씨들이었다.

젊고 기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장으로부터 단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손 공장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당시 성광 직원들 뿐 아니라 의성군내 아가씨들로부터 지금의 BTS급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출근길에는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짓궂게 구는 누나들도 많아 정문으로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퇴근하면 뭐하냐고 묻거나 도시락을 싸와서 전해주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입고 온 회사 점퍼를 밖에 걸어두면 항상 러브레터가 수북이 들어 있었죠. 성냥공장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아이돌 인기를 누렸습니다, 허허!"

일반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집이나 업소 등에 불이 나면 출동하는 소방차가 진입하기 좋게 돕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성광 성냥공장 경우 "불났다. 소방차 들어온다. 대문 걸어 잠궈라!"고 외치기 일쑤였다.

성냥 공장은 어떻게 보면 불을 만드는 장소이다. 매일 날씨는 물론, 온도, 습도 등을 체크하고 오전 조회 시간에는 안전 교육과 공장 전반의 관리를 철저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화재가 발생하곤 했다. 성냥개비 두피에 바르는 염산칼륨의 배합에서 발생한 미묘한 차이, 작업 중 성냥이 땅 바닥에 떨어지거나, 작업자의 옷깃에 스치기만 해도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대략 1년에 2번 정도는 화재가 발생했다. 지금과 달리 80년대에는 소방차 설비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도리어 성냥공장 내의 소화시설이 나았다. 성광 성냥공장에는 당시 보기 힘든 5마력 모터가 부착된 소화 호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화재 발생 시 능력을 발휘했다. 어지간한 불길은 소방차가 오기도 전에 공장 내에서 자체 진압을 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건조실에서 불이 나면 소방차가 와서 해결해야 했다. 대형 소화기 몇 대와 사내 소방 호수 몇 개로 진압이 불가능했다. 건조실 화재는 때론 공장의 전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지만 다행히 그 같은 대형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화재의 규모에 관계없이 불이 나면 공장 주변 주민들이 소방서에 신고를 한다는 점이다.

염분이 섞여있는 소방차의 물이 기계에 뿌려지면 설비가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건조실의 대규모 화재가 아닌 이상은 자체적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민 신고로 소방차가 출동하면 소방관들은 불이 있는 곳은 모두 진압을 하므로 공장장이 이를 필사적으로 이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에 물을 뿌리지 말라고 해도 소방서 입장에서는 화재 진압이 우선이므로 불길이 있는 곳은 어디나 소화수를 뿌릴 수밖에 없었다.

"불이 나면 공장장인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직원들은 ‘불났다, 소방차 온다, 못 들어오게 문걸어 잠궈라’고 외치는 사태가 종종 벌어졌죠. 당시 소방서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같은 추억이 담겨있는 의성 성광 성냥공장은 지난 2016년 폐업했다. 비록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라졌지만 성광 성냥공장은 한때 의성 지역 근대화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의성 주민들 삶의 애환을 품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성군은 2021년 ‘성냥공장 문화화 재생사업’에 착수, 타 시군과 차별화된 모범사례를 만들어 2025년 의성 주민의 품으로 돌려줄 계획이다. 역사적 건축물은 지역의 지적 수준을 나타내고 지역민의 풍부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성냥공장은 단순히 성냥을 생산했던 공간이 아닌, 의성 지역의 근현대 문화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현세대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세대 간 소통의 키워드가 될 것이란 의미에서 문화화 재생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김주수(70) 의성 군수는 "한국 산업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성광 성냥공장을 경제적 실리로만 바라보고 평가하기보다는 지역의 근현대 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차별화된 복합문화 공간으로 조성,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동시에 모색하여 지역 성공사례가 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김주수 의성 군수는 “한국 산업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성광 성냥공장을 지역의 근현대 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차별화된 복합문화 공간으로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은 기자

김주수 의성 군수는 “한국 산업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성광 성냥공장을 지역의 근현대 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차별화된 복합문화 공간으로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은 기자

손 씨는 현역 시절, 공장 뒤편 벤치에 쉬고 있다 날아온 벌떼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벌을 치기 시작했다. 공장장을 그만두고는 양봉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이제는 600통에 이르는 벌떼를 키우며 양봉 농가로 성공했다. 제2의 인생 역시 성광 성냥공장이 마련해준 셈이다.


의성 성광 성냥공장의 옛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박상은 기자

의성 성광 성냥공장의 옛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박상은 기자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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