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대통령 소유 농장에 5인조 도둑이 침입해 400만 달러(51억여 원) 현금 다발을 훔쳐갔다. 이 나라는 범죄를 신고하지 않으면 불법이지만 대통령은 피해 사실을 감췄다. 대신 전현직 경찰관을 풀어 범인들을 잡아들인 뒤 이번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며 돈을 줬다. 사건 발생 2년여 만에 폭로돼 남아공 정계를 달구고 있는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의 '팜(농장) 게이트' 의혹이다. 라마포사는 도둑맞은 돈이 농장 수익이라고 해명했지만, 야당은 당국에 자금 출처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 전임 대통령 제이콥 주마는 '굽타 게이트'로 4년 전 중도 사퇴했다. 인도계 재벌인 굽타 일가 삼형제가 비선실세 노릇을 하며 이권을 독점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원전 사업 추진에 방해가 되자 재무 장관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주마는 비리 백화점이었다. 2009년 대통령이 됐을 때 검찰이 기소를 무마해준 사건만 공갈·사기·돈세탁 등 18건이다. 취임 전엔 강간 혐의로도 기소됐다.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고 피해자는 망명을 신청했다.
▦ 두 스캔들은 전현직 대통령의 비방전 양상을 띤다. 이달 초 팜 게이트를 폭로하며 라마포사를 고발한 인사는 주마 최측근인 전직 국가안보국장이다. 며칠 뒤 라마포사 정부는 굽타 삼형제 중 둘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두 달 전엔 "주마가 굽타 가문에 나라를 통째로 팔아넘겼다"는 조사보고서도 발표했다. 집권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라마포사와 주마 지지자로 갈려 연말 당대표 경선을 두고 경쟁 중이다. 남아공은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의회는 국민 80%인 흑인을 대변하는 ANC가 장악한지라 당대표가 되면 내후년 대선은 따놓은 당상이다.
▦ 두 사람은 남아공 민주정부 초대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의 동지이자 후계자다. 주마는 열일곱에 ANC에 가입해 이 나라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투신했고, 만델라가 27년간 정치범으로 수감됐을 때 함께 복역하기도 했다. 라마포사는 만델라가 석방 후 ANC 의장을 맡아 백인 정부와 민주헌법 제정 협상을 할 때 사무총장으로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들의 노추가 흑인 해방에 헌신한 그들 자신과 만델라의 얼굴을 먹칠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