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추상을 다루는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과 달리 오페라는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은 대본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이야기들은 현재의 우리에게 낯설고 과장된 것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진 많은 작품들이 현재와 소통하면서 오페라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보다 강한 영향을 끼쳤다. '나부코', '에르나니'를 포함한 베르디의 많은 오페라는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 과정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영국 튜더 시대의 왕권 내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도니체티의 ‘여왕 삼부작’ '로베르토 데브뢰',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종교와 정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희생됐는지, 약자의 시선에 공감하며 현재의 종교와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국내 초연한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1282년 시칠리아에서 프랑스인과 친 프랑스 인사 2,000여 명이 사망한 '만종 전쟁'을 소재로 강압적인 프랑스 군 지배에 대항한 시칠리아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롭게도 1855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에 선보이기 위해 프랑스가 이탈리아인인 베르디에게 위촉한 오페라에 두 나라 간의 갈등의 역사를 담았다. 이 작품은 다층적 사연을 가진 네 사람의 갈등이 얽혀 있다.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를 증오하며 성장한 시칠리아 애국청년 아리고, 뒤늦게 아들 아리고의 존재를 알고 강한 부성애를 느끼게 된 프랑스인 총독 몽포르테, 프랑스 군에 의해 시칠리아 왕인 오빠를 잃게 된 공녀 엘레나, 그리고 시칠리아의 애국 열사 프로치다가 등장한다.
많은 베르디 작품들처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서도 아버지는 갈등을 제공하거나 해결하는 중요한 존재다. 극 초반에 폭군으로 묘사되었던 몽포르테는, 아들 아리고가 엘레나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시칠리아와 프랑스는 형제의 나라’라며 대화합을 선언하고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강조된다. 하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의사 프로치다의 봉기 앞에 어렵게 맺어진 부자관계, 연인관계는 깨지게 되고 주인공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전쟁 속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구조를 보여주며 민족의 독립과 정치적 명분, 원수 갚음을 위해 치러야 할 또 다른 희생, 그리고 개인의 행복과 희망은 모든 명분 앞에 당연히 묻혀버려도 되는가 질문하게 된다.
역사는 큰 줄기에서 사건과 결과를 기록하지만, 역사 속 인물 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그려낸 예술작품은 전쟁을 겪는 개개인의 현실적인 아픔을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주며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가 한국의 비통한 역사와 슬픔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보편적인 서사로 읽히는 것처럼, 수백 년 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전쟁의 뒷이야기 역시 현재의 한국에서 각별하게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베르디의 음악이 이끌어내는 오페라만의 서사 진행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와는 또 다른 차원의 여운과 감동을 전해준다.
어렵게 읽힐 수도 있었을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국내초연 무대는 호연이었다. 발레 부분을 삭제해도 연주시간이 3시간 30분이나 됐지만 소프라노 서선영, 테너 강요셉, 바리톤 양준모와 베이스 최웅조, 쿱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홍석원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캐스팅은 베르디 음악의 진중한 매력과 작품의 진가를 잘 맛보게 해줬다. 미니멀한 무대 연출 또한 시선을 사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손에 칼과 창 하나 없이도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을 잘 담아냈다. 특히 푸른색과 오렌지색으로 프랑스인과 시칠리아인을 상징한 색깔 배치는 민족 간의 갈등과 대립, 심리 변화를 매우 세련되게 표현했다. 현대적 연출 덕에 억압받는 자의 고통, 대의 속에 버려진 개인의 행복 등 지금 관객에게도 유효한 주제로 소통하는 오페라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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