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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도 책임자도 없었다... 전쟁의 또다른 이름 '민간인 희생' [6·25 72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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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도 책임자도 없었다... 전쟁의 또다른 이름 '민간인 희생' [6·25 72주년]

입력
2022.06.25 09: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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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폭격 피해자 수천 명... 유족은 냉가슴만
한강인도교 폭파 등 진실규명 여전히 제자리

1951년 8월 20일 포격과 폭격에 파괴된 서울 외곽 건물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1년 8월 20일 포격과 폭격에 파괴된 서울 외곽 건물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6·25 민간인 희생자들은 좌우 이념에 의해 학살된 '전쟁범죄' 피해자들입니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 정연조씨

1950년 11월 출생한 정연조(72)씨는 유복자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같은 해 7월 국민보도연맹(정부의 좌익 관리ㆍ통제 조직)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피살됐다. 6ㆍ25전쟁 당시 자행된 ‘빨치산 토벌’ 집단학살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고난은 대물림됐다. 1978년 청원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도, 1980년 밥벌이를 위해 중동 노동자로 나가려 해도, 정씨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서슬퍼런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신원조회에서 탈락했다. “이념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학살 피해자 가족인데도 희생양이 됐습니다. 72년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국가가 명예를 회복해 줬으면 합니다.”

민간인 '폭격' 피해자 수천 명... 배상·규명은 시늉만

한상순씨가 21일 서울 용산구 효원경로당에서 6·25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한씨 가족은 당시 가족과 집을 잃었다. 왕태석 선임기자

한상순씨가 21일 서울 용산구 효원경로당에서 6·25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한씨 가족은 당시 가족과 집을 잃었다. 왕태석 선임기자

살육으로 얼룩진 전쟁은 무수한 민간인 희생자들을 낳았다. 고통은 진행형이다. 여전히 국가로부터 합당한 배상을 받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다. 전쟁통에 서울 용산에 살았던 한상순(87)씨도 미군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었다. 한씨는 “6ㆍ25가 터지자마자 맨 처음 폭격을 당했다”며 “집이 무너지면서 사촌동생은 죽고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긴 가족도 보상이나 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1기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2005~2010년) 활동 덕에 6ㆍ25 민간인 희생자 및 유족은 1억5,000만 원 정도의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극히 일부다. 국가 상대 소송 소멸시효가 지났다거나, 인민군에 맞서다 숨졌다는 이유로 배ㆍ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김복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장은 24일 인터뷰에서 “남북 모두 ‘부역’ 명분을 앞세워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면서 “억울하게 죽은 선대의 명예를 회복할 법안 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정부와 국회가 손 놓지 않고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 등이 올해 1월 발의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위에 계류돼 있다. 전쟁 희생의 개념을 명확히 해 적절한 배ㆍ보상을 하기 위함이다.

진실화해위도 진상규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5월 조사를 개시한 2기 위원회는 7일부터 용산 폭격 희생 5건을 포함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ㆍ총격에 의한 피해 사건 40건을 조사 중이다. 김광동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억울한 희생이 한 점도 남지 않도록 다른 법과 형평성을 맞춰 제도를 보완해야 하고, 정당한 보상 조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72년간 책임자조차 가리지 못한 '한강교 폭파'

한강대교 인근에 설치된 한강인도교 폭파 피해 희생자 추모 동판. 비석에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국군은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의 도항을 막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때 원통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이 글을 새긴다"고 쓰여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한강대교 인근에 설치된 한강인도교 폭파 피해 희생자 추모 동판. 비석에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국군은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의 도항을 막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때 원통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이 글을 새긴다"고 쓰여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중에서도 ‘한강다리 폭파’ 사건은 6ㆍ25 과거사 1순위 규명 과제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기습적으로 진행된 한강교 폭파로 서울 시민 상당수가 서울에 남겨졌다. ‘서울은 안전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만 믿었던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자 군 수뇌부는 교량 폭파를 수행한 군 관계자들을 뒤늦게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재판부는 그해 9월 그저 명령을 따른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물어 총살형에 처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죄를 벗었다. 1964년 최 대령의 부인이 청구한 재심에서 “상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행전안전부 국가기록원 자료에는 ‘누가 폭파를 명령했는지, 진정한 책임자는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당연히 피란을 가다 한강 인도교 위에서 국가로부터 살해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도 이뤄질 수 없었다. 그 수만 수천 명을 헤아린다. 대통령이나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김기준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2007년부터 한강교 폭파 피해자들의 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열고 있다. 김 상임대표는 “무고한 시민들이 국가의 잘못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준 적이 없다”면서 “전쟁 피해자에 대한 사과의 시효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주예 기자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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